한국일보

‘애지중지 하고픈’부자들

2019-07-0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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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업계를 대표하는 많은 투자가들과 억만장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5월 LA 베벌리힐튼 호텔서 열린 ‘밀큰 연구소 글로벌 컨퍼런스’의 주도적 담론은 ‘자본주의 위기론’이었다. 상당수 연사들이 미국이 현재의 경제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을 경우 혁명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병든 자본주의 치료를 위한 쓰디 쓴 약의 처방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글로벌 투자기업인 구겐하임 파트너스의 앨런 슈워츠는 젊은이들 사이에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계급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무려 20억 달러를 벌어 미국 25번째 부자로 이름을 올린 투자가 레이 달리오의 “성장과 분배 시스템이 개혁되지 않을 경우 모두가 피해를 입는 혁명의 위험이 있다”는 발언 역시 같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컨퍼런스 주최자인 마이클 밀큰 또한 ‘양심적 자본주의’에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억만장자들의 베벌리힐튼 발언이 병들어 가고 있는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원론적 우려를 드러낸 것이라면 지난주 억만장자 19명이 민주당 대선주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전체 1% 부자들 중에서도 10분의 1에 해당하는 최고부자들인 우리들에게 더 많은 부유세를 부과하라”고 촉구하고 나선 것은 보다 구체적인 처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과거 미국의 ‘애국적 부자’들이 자신들의 세금을 더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적이 있긴 하지만 부자들의 셀프 중세요구는 여전히 낯선 장면이다.


최근 연방준비제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0년 간 미국 하위 50%의 부는 9,000억 달러가 줄어든 반면 상위 1%의 부는 무려 21조 달러나 증가했다. 하위 50%가 특별히 게으른 것도, 상위 1%가 수백 배 유능한 것도 아닐 진데 이런 부의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시스템의 결함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부 수퍼리치들에게 이런 상황과 현실은 너무나도 불편한 것 같다.

서한 서명자 가운데 하나인 일라이 브로드가 지난 25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은 억만장자로서, 그리고 ‘기부천사’라 불리는 자선사업가로서 쏟아온 자신의 노력에 대한 좌절감을 담고 있다. 브로드는 가진 것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 책무라는 믿음 아래 20년 전부터 풀타임 자선사업가로 나섰지만 “어떤 자선도 대다수 미국인들의 아메리칸 드림 성취를 막고 있는 뿌리 깊은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는 역부족이란 걸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결국 시스템을 고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주장이다.

부자증세 논쟁은 보수와 진보의 철학과 연관돼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재량권을 우선시한다.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걷어 가는 것은 이들의 신념을 건드리는 것이 된다. 또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 그리고 시장이 자연스럽게 작동한 결과라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보수정당인 공화당은 모든 형태의 증세를 극력 반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서한을 만든 억만장자들처럼 보수의 이런 논리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부자들이 적지 않다. 그 선봉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다. 그 역시 지속적으로 부자증세를 역설해왔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있다. “수퍼부자들을 이제 그만 애지중지하라”는 것이다. 물론 부자들 철벽방어에 열심인 공화당을 향해 날리는 말이다. 하지만 서민들로서는 ‘자본주의의 양심’에 대해 고민하는 이런 부자들을 애지중지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부유세에 찬성하는 미국인들은 약 70%에 달한다. 억만장자들의 증세 요구로 부유세는 내년 대선의 핫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미 몇몇 민주당 주자들이 구체적인 부유세 공약을 내놓은 상태이다. 현재는 약 70%의 미국인이 이에 찬성하고 있지만 반대하는 억만장자들과 공화당이 금권을 앞세워 대대적인 저지 캠페인을 벌일 것은 자명하다. 결국 부유세의 운명은 치열한 캠페인 속에서 유권자들이 지금의 생각을 흔들림 없이 지킬 수 있을지 여부에 달렸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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