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밀밭’

2019-06-25 (화) 12:00:00 Barbara Cro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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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성수환 ‘여름밤’

그는 그저 밀밭의 단순함과 사랑에 빠졌던 거다
나도 그랬다, 민트 쵸콜렛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 사랑에 빠진 바보
이미 어떻게 결말이 날 줄은 알고 있었지
큰 낫에 잘리고, 8월의 태양 그 화덕에 타버려서,
요동치며, 갈라지며, 겉겨가 벗겨지는 알곡들,
지금은 봄, 밀밭은
잘 정돈되어 있다.
노란빛을 띤 그린, 스냅 콩, 세이지. 청자색.
밀짚더미가 썩어 내리고
그의 붓 자국은 쌓여간다. 파도 위의 파도
캔버스에서 미끄러진다,
굴러 떨어진다. 바다를 향해

Barbara Crooker ‘밀밭’ 전문
임혜신 옮김

고흐는 정말 많은 밀밭을 그렸다. 그가 사랑에 빠졌던 밀밭은 종교적 염원과 관계가 깊다고 하는데 씨를 뿌리는 지상의 일과 거두는 천국의 일에 매혹되었던 그의 그림들은 절대자를 향한 공물이었는지 모른다. 고흐의 밀밭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노란색은 밀알을 흔드는 바람과 햇살에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눈 먼 자이다. 그리고 사랑에 눈 먼 자는 미치도록 단순해진 자이다. 고흐의 밀밭은 미친 붓자국으로 파도친다. 시인은 그 붓자국 이전이나 이후, 그러니까 모든 미침과 열정이 다한 고요를 읽는다. 정돈된 밀밭은 위로 사라져 흘러내리는 붓자국, 슬픔처럼, 끝은 캔버스 밖 바다라는 세상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곳이 혹시 신의 세상일까, 더 이상 열정도 아픔도 필요하지 않은 사랑 이후의 세상이… 임혜신<시인>

<Barbara Cro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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