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62) 제39대 Jimmy Carter 대통령①

2019-06-24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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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전 6월 9일자의 News 에는 그간 몸이 불편하여 잠시 중단하였던 교회주일학교 교사일을 아흔네살로 “born-again Christian” (Baptist) 이라는 Jimmy Carter 전 대통령이 다시 계속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는 대통령직을 퇴임했던 1981년 부터 고향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해왔었다고 한다.

사람들중에 더러는 “아무리 촌구석이라지만 주일학교 교사할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나?” 라고 냉소하기도 할 것이다. 또 대통령 퇴임후 전세계의 극빈한 무주택자들을 위해서 Habitat for Humanity 라는 공익사업을 시작한후 세계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Carter 가 고등학교때 부터 취미로 익숙해졌던 솜씨로 직접 목수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목수가 그리도 모자라는가?” 라고 냉소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Jimmy Carter 가 어떤 인물인가를 분석해 보기 위해서는 위에 말한 일화들을 먼저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Jimmy Carter 대통령은 James Earl Carter 라는 본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Jimmy” 라고 불러 달라고 하였었다고 하며 실제로 서류들에도 Jimmy Carter 라고 서명 하였었다고 한다. 겉으로 보이던 인상도 꾸밈이 없고 소탈해 보였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미국이 심각한 유류난을 경험하고 있던때에 대통령에 취임했던 Carter 는 연료절약을 위해서 싸늘할 정도로 난방을 한 백악관 사무실에서 정복을 입지않고 Sweater 를 입고 사무를 보아서 경비를 절약하려는 소탈한 대통령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통령 “체통”유지도 못하는 위선자 라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해외출장 중에 손수 briefcase 를 들고 다닌다고 해서 대통령이 체신 머리를 지키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었다. 똑같은 물건도 보는이의 타고난 시력에 따라서 크게도 또는 작게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Carter 는 큰 집회에서 청중들을 움직이는 대웅변가는 못되었으나 Town Meeting 같은 작은 모임 에서는 대화도 잘하고 설득력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외국에서 우리가 평가했던 미국의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미국민들이 가지는 같은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라는 경우가 더러 있다. Carter 에 대한 미국인들, 특히 보수쪽의 평가는 “중하급”이었었다고 한다.

세계의 평화를 꿈꾸어서 미국의 “국제적 역활”을 강조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던 Woodrow Wilson 은 그가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암울했던 국운에 처해있던 우리들이 Wilson 의 본의보다는 훨씬 확대해석 해서 우리의 독립운동에 자극도 주었었고 3.1 독립선언서에도 그의 주장이 거의 인용되었을 정도로 깊은 영향을 준 “위대한” 미국대통령으로 생각해 왔었는데 사실은 Wilson 도 당시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보수측 사람들로 부터는 “중하급” 대통령으로 평가 받았었고 두번의 대통령선거때 마다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던 인물이었다.

두 대통령 들이 “America the greatest!” 를 역설하지 않았던 까닭에 “국제적인 안목”이 없는 많은 미국민들의 고립주의적, 국수주의적인 편협한 생각에는 마땅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이 두 대통령이 최근 소학교 3학년 사회과목 시간에서나 나올씀직한 “America First!” 라는 Trump 대통령의 치졸한 선거구호에 박수갈채를 쳐대고 있는 유치원 수준의 많은 미국민들을 그때에도 이끌어 나가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가 라고 측은한 생각도 드는데 요즈음의 Trump 대통령은 외교수단으로는 “협박”밖에 몰라서 국제정치, 경제, 무역에 큰 불화를 초래하고 그가 떠난후의 Post-Trump World 를 앞으로 어느나라의 어떤 지도자가 다시 정상화 시켜 놓을 것인지 깊이 우려되고 있다.

Trump 의 “Make America great again!” 이라는 저수준의 구호를 비꼬아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어 보고자하는 Joe Biden 전부통령의 “Make America America again!” 이라는 구호는 “참신”하고도 아주 대조적이어서 자못 흥미롭다.


특히 Carter 는 우방, 적대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전세계적인 인권옹호를 주장하였 으며 한국을 방문했을때에 인권옹호와 정치적 탄압에 대한 문제들 신문에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크게 언쟁이 있었다는 후문을 듣고 우리의 국내외 반독재 진영 에서 크게 격려도 받았었던 까닭에 Carter 에 대한 미국민들의 평가절하는 상당한 실망감을 주는 일이기도 하였다.

미국 대통령이 국내외에서 동시에 “위대한 대통령” 이라고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음을 이해할수 있게 된다.

Jimmy Carter 의 가정환경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635년에 온 영국계 이민의 후손인 Jimmy 의 부친 James Earl Carter, Sr. 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10학년을 마친고등학생으로 미육군에 자원입대하여 6년여 동안 하사관으로 복무하던중 간부 후보생으로 선발되어 초급장교 로 복무하다가 제대하여 Georgia 주의 Plains 에서 general store 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땅을 사서 성공적인 땅콩농장을 경영하였었다고 한다.

당시 Plains 는 600여명의 주민들이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이 농장노동자들인 흑인들이 었었다고 한다. 그는 한때 Georgia 주 하원의원 으로 정치에 참여 하기도 하였었다고 한다. 그는 Jimmy 가 어렸을적에 교회의 헌금접시에서 1전을 훔친것을 알고는 회초리로 매를 때리며 훈계 하였었는데 Jimmy는 그 체벌을 받은 이후 일생동안 아무것도 훔쳐본적이 없었다고 술회 하였었다고 한다.

그는 땅콩농장을 잘 경영하다가 50대에 Pancreatic cancer 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전자가 자녀들에게 유전 되었던 까닭이었던지 막내아들이 50대에 Pancreatic cancer 로 사망하였고 두 딸들도 60대에 역시 Pancreatic cancer 로 사망하였으며 큰아들인 Jimmy 도 90대를 지나서 Pancreatic 증세가 나타났다고 한다.

아마 Jimmy 에게 훨씬 더 영향을 준 사람은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들을 남겨놓은 맹열여성인 모친 Bessie Lillian (Gordy) Carter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편국장의 딸로 태어난 Lillian 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R.N.) 이 되었었고 Jimmy 는 미국 대통령중에서 최초로 병원에서 출생한 사람이 되었었다고 한다. 병원등에서 7년반 동안 간호사로 일한 후에 Practicing Nurse 로 촌락이었던 Plains 에서 의사처럼 활동 했었던 듯하다. 회계학 공부도 조금 한후에 남편의 땅콩농장의 장부정리를 직접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Lillian 은 흑인 노동자들에게 친절 하였었다고 한다. 당시의 관례로는 흑인이 백인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뒷문을 통해서 출입하는 것이었었는데 Lillian 은 흑인들이 현관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하였었고 흑인들과 응접실에서 대화하고 식사도 같이 하였었다고 한다. 아마 무언중에 자녀들에게 인종차별이 옳지 않음을 가르켜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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