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흥자이망’

2019-05-22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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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은 열흘 전 대구를 방문한 황교안 대표가 쓰레기 수거차량 뒤에 매달려 가는 사진을 찍어 공개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다. 환경미화원 복장을 한 황 대표가 청소차 뒤 발판에 올라 뒤따라오는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 사진은 누가 봐도 연출한 것이었다. ‘민생투쟁 대장정’에 나선 황 대표의 서민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당장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는 쇼”라는 비난이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황 대표가 청소차 발판 위 이동 금지와 보호장비 착용 규정을 무시하고 사진을 찍은 것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관심을 모은 것은 같은 당 홍준표 전 대표가 현 황교안 대표에게 건넨 훈수였다. 홍 전 대표는 “이미지 정치로 성공한 사람은 이미지가 망가지는 순간 몰락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몰락 사례’로 언급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박근혜의 정치는 이미지로 시작해 이미지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잘 만들어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포장하고 능력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만들어내며 청와대의 주인이 됐다.


하지만 희대의 국정농단 스캔들로 그 이미지가 완전 허상이었음이 까발려지면서 순식간에 몰락했다. 한 시사주간지가 지난 주 공개한, 박근혜가 당선인 시절이던 2013년 2월 최순실과 함께 취임사 초안을 고치는 80분 분량의 ‘비선 회의’ 녹음파일은 박근혜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치 최순실이 박근혜에게 지시하는 것 같은 대목이 여러 곳 나온다.

정치인들에게 이미지는 목숨과 같다. 어떤 내실을 갖고 있느냐보다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더 중요하고 실제로 그런 이미지가 정치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특히 매스미디어와 디지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자신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 한 장의 사진, 한 개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 낼지를 고민한다.

청소차에 올라타 황 대표가 벌인 ‘서민 코스프레’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이다. 이명박은 작업모를 쓴 채 연탄을 나르고 허름한 국밥 집에서 입에 한가득 국밥을 우겨넣으며 친 서민행세를 했다. 툭하면 민생을 살핀다며 재래시장을 찾아 어묵이나 사먹고, 사진 한 장 만들려 장애인 목욕, 김장 등 이벤트에 얼굴을 내미는 정치인들의 속내도 마찬가지다.
사진비평가 김현호는 “사진은 결코 투명한 창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시스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진과 이미지에도 순수하지 않은 의도와 목적이라는 불순물이 얼마든 끼어 있을 수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이 담긴 책의 제목은 ‘거짓말 상회’이다. 사진과 이미지는 ‘거짓말 상회’에서 아주 잘 팔리는 인기 상품이란 얘기일 것이다.

대중을 상대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이미지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하지만 내실과 콘텐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랜 기간 힘들게 쌓아 올린 이미지도 한 순간에 무너지게 돼 있다. 대중을 한 순간 속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자신의 실체를 감추기는 불가능하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이미지와 코스프레 사진들로 대중을 현혹하고 되도록 많은 표만 받으면 된다는 발상은 지극히 위험하다. 정치 입문 몇 개월도 되지 않은 황 대표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걸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자신을 픽업해 준 박근혜 전 대통령 어깨 너머로 배운 정치기법 같은데, 너무 조급한 것 같다. 대표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대선을 겨냥한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황 대표는 이미지 만들기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실력을 다지고 현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게 옳다. 그리고 대승적으로 민생문제 협치에 나서는 것이 정치적 장래를 위해서도 현명하고 바람직하다. 국민들은 이명박근혜 시대를 거치면서 화보정치와 이미지의 기만성에 대해 충분히 학습을 했다. ‘이흥자이망’(이미지로 흥한 자 이미지로 망한다)이라는 홍준표 전 대표의 조언에 황 대표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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