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지난 주 2020년 대통령선거 민주당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런데 출마 선언을 준비하면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니타 힐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28년전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한 것이었다.
28년전에 있었던 일이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성희롱 사건, ‘아니타 힐 청문회’를 말한다. 1991년 변호사이자 법대 교수였던 아니타 힐은 클레런스 토마스 연방대법관 지명자를 검증하는 인준청문회에서 그에게 당한 성희롱을 고발했다. 미역사상 두번째 흑인 대법관(첫번째는 더굿 마샬) 후보였던 토머스가 고용평등기회위원회(EEOC) 위원장 시절에 부하직원이던 힐에게 데이트를 계속 요구했고, 자신의 성기 크기와 정력을 자랑하는가 하면 수많은 포르노영화 장면들을 묘사하는 등 입에 담기 어려운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 여성들이 무심히 지나치거나 참아낼 수밖에 없었던 남자동료들의 성적 희롱 문제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순간이었다. 모든 여성이 경험했지만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던 것을 힐이 말했고,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란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만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청문회를 진행한 법사위원회 소속 14명의 상원의원들은 모두 보수적인 백인남성들이었다. 청문회장은 토마스가 아니라 힐에 대한 심문의 장으로 변했고, 의원들은 집요하게 피해사실을 캐물으며 추궁했다. 왜 그땐 가만히 있다가 지금 문제제기를 하느냐,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달라는 등 비웃고 괴롭히며 2차 가해를 퍼부었고, 3일 동안 청문회 중계 TV 카메라는 그녀를 죄인처럼 비췄다. 그러나 힐은 이들의 모욕적인 질문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함과 품위를 유지하며 끝까지 차분하게 증언했고, 그 모습을 전 국민은 지켜보았다.
청문회에서 성희롱 혐의를 전면 부인한 클레런스 토마스는 상원 본회의에서 58대 42라는 역대 가장 근소한 표차로 대법관에 인준되었다. 그는 아직도 현직에 있다.(이 사건은 작년에 있었던 브렛 캐버노 대법관의 인준청문회를 연상케 한다. 캐버노 역시 젊은 시절의 성폭행미수 혐의가 고발돼 똑같이 전국적 관심 속에 청문회를 거쳤으나 결국 대법관이 되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렇듯 아니타 힐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살해협박과 강간협박을 받았고 종신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클라호마 대학을 떠나야했다. 하지만 힐의 증언 이후 많은 여성들이 성추행과 폭력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직장 내 남녀 직원간의 문화가 달라졌고, 성추행 고발이 두배 이상 증가하면서 기업 내 성폭력 예방 프로그램도 활성화됐다. 청문회 직후 시작된 ‘아니타 힐을 믿는다’(I believe Anita hill) 운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아니타 힐’(2013)과 영화 ‘컨퍼메이션’(2016)도 만들어졌다. 그녀는 현재 보스턴의 브랜다이스 대학의 사회정책 및 법학, 여성학 교수이다.
그런데 그때 조 바이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는 청문회를 주도한 상원 법사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청문회의 분위기를 이끌어갈 주도적 위치에 있었으나 편파적으로 흘러가는 청문회를 방조했고, 토마스 후보가 모두 발언을 요청하자 이를 허용함으로써 그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으며, 결정적으로 토마스에게 비슷한 성희롱을 당했다며 아니타 힐을 지지하는 증언을 하겠다고 나선 3명의 여성을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는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최근에 와서 바이든은 “당시 아니타 힐이 내 동료들에 의해 인신공격을 당했고, 그런 질문과 질문방식을 막기 위해 내가 더 노력했어야 했다”며 후회한다는 의사를 여러번 밝혔다. 시대가 바뀌고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지금, 이 문제가 대선가도에 걸림돌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개인적으로 ‘부적절한 신체접촉’이 문제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달 초 바이든의 사과 전화를 받은 힐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변화와 책임을 보여주는 진정성 있는 사과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나에게만이 아니라 당시 그의 행위로 인해 깊이 실망하고 상처받은 모든 미국인들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은 민주당에서 2020년 대선주자에게 원하는 자질을 두루 갖춘 후보다. 6선 의원에 부통령 경력을 가졌고, 상냥하고 품위 있는 이미지를 지닌 그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경선주자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니 28년전 있었던 일이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이 높다. 그러나 1년 반이나 남았다. 이 문제는 ‘미투 시대’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에 지속적으로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또 하나, 아무리 성희롱 인식이 개선되었다 해도 완전한 평등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많은 사람들은 클레런스 토머스와 브렛 캐버노의 혐의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대법관으로 인준된 곳 역시 미국사회다. 성차별의 뿌리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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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