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

2019-04-24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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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인기 연예인들이 자신들만의 단톡방을 통해 저질러온 은밀한 행위와 범죄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파문이 계속 커지고 있다. 특히 평소 깨끗한 엄친아 이미지를 내세워 사랑을 받아온 일부 연예인들의 스캔들 연루는 대중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수년 동안 단톡방에서 오고 간 메시지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멈출 줄을 몰랐다. 단톡방 구성원들 사이에 강하게 형성돼 있던 ‘끼리끼리’ 의식과 은밀성이 판단력을 마비시킨 것이다.

이런 판단 마비는 메신저가 가진 특성에 기인한다. 메신저는 블로그나 이메일보다 훨씬 더 사적인 대화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블로그나 이메일을 사용할 때는 기록이 남는다는 것을 의식해 표현에 조심하게 되는 반면 카톡을 나눌 때는 이런 조심성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즉각적으로 무수한 대화가 오가다 보면 메시지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잊기 쉽다.

특히 오랫동안 단톡방에서 은밀하게 서로의 비밀을 나누다 보면 공범의식 같은 게 형성된다.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니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사달이 난 게 이번 단톡방 파문이다. 최근 한 한인 여성 시의원이 메신저에 남겼던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나면서 곤경에 빠진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흔들리지 않는 양심과 도덕적 올바름을 지니고 산다면 세상은 아무런 문제도, 다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적 해이와 일탈을 막아주는 감시와 규제, 그리고 길에서 벗어났을 때 제 길로 돌아가라고 상기시켜주는 ‘리마인더’가 필요한 것이다.


거리 곳곳에는 지나는 차량들의 속도를 알려주는 전광판 속도계들이 서 있다. 별 생각 없이 달리다 속도계에 내 차량의 속도가 찍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에 발을 얹게 된다. 경찰이 쫓아오는 것도, 누가 티켓을 발부하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줄인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만 받아도 일탈의 유혹은 상당부분 억제된다. 무인 도넛판매대 위에 거울을 놓거나 사람 눈을 그려 넣는 것만으로도 돈을 놓고 가는 비율은 두 배나 늘어난다. 이것이 도덕과 규범을 일깨워주는 시선의 역할이다. 거리의 속도계, 그려 넣은 눈, 그리고 감시카메라 등은 수동적 억제를 유도하기 위한 물리적 시선들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관계없이 언제나 스스로 자제하도록 만들어주는 정말 강력한 힘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는 어떤 무형의 존재로부터 나온다. 근대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는 이런 존재를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라 불렀다. 스미스는 도덕철학자이기도 했다.

‘공정한 관찰자’는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내 행동이 옳은지 알려주고 판단해주는 가상의 인물이다.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 덕분에 우리는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존재를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일탈과 범죄, 그리고 자제와 양심의 길이 갈리게 된다.

동양의 옛 성현들도 일찍이 이런 진리를 깨우치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으로 봤다. 홀로 있을 때, 즉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하고 언행을 삼가는 ‘신독’(愼獨)을 군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긴 것이다.

만약 철없는 연예인들이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빗나간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을 것이다. 군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공정한 관찰자를 떠올리기 힘들거나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순간순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리마인더’를 만들어 두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가령 필수품이 되면서부터 동시에 온갖 말썽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스마트폰 모퉁이에 눈 그림 스티커라도 붙여 놓는다면 말과 문자를 주고받는 일에 좀 더 신중해지지 않을까 싶다. 자동이 안 되면 수동으로라도 하면 된다. 사회 전체로는 올바른 감시와 감독 시스템을 만드는 게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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