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과 개’

2019-04-16 (화) Paul S. P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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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개’

김종성 ‘alive’

북극의 빛, 그 흰색을 본 개의 머리 속
환한 불이 켜진다

순수한 수정의 아드레날린, 순식간에
문을 뛰쳐나가 길을 건너더니

찾아헤맨다, 뒷다리가 긴 눈장화 토끼, 북미산 순록과 고양이들을
야생의 혈통에 불이 붙은 개는

눈 속에 코를 박는다, 제 눈이 파묻힐 때까지
거기서 그는 꿈을 찾는다. 주인은 현관에서 소리치지만

그는 듣지 못한다. 그가 듣는 것은 오직
툰드라를 가로지르는 바람의 울부짖음, 저 오랜 고대의

실존적 비명, 이리떼의 순수한, 파괴적 허기
사료를 먹을 시간. 가능한 한 먼 길을 돌고 돌아

그는 현관으로 돌아온다. 주인이 뭐라 생각해도 좋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Paul S. Piper ‘눈과 개’ 임혜신 옮김

눈밭을 마구 달리며 파헤치는 개는 시베리안 허스키인가. 아니라도 좋다. 지금 이 개는 주인이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들리지 않는 야성의 이리다. 얼어붙은 빙설 속,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욕망과 불안과 자유의 존재다. 소리쳐 부르는 주인에게로 돌아갈 시간을 가능한 지연하며 본성의 즐거움에 빠진 개의 모습에 문득 우리네 인간이 스친다. 인간을 먹이며 속박하는 인간의 가상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우리가 만든 자본과 정치라는 시스템이기도 하고 우리의 헛된 이념이며 법이며 도리일 수도 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고 평안 또한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위해선 안정을 바쳐야 하고 안정을 위해서는 자유를 바쳐야 한다. 우회로를 돌고 돌아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개와 사람의 뒤에서 눈은 여전이 북극의 욕망으로 빛나고 있다. 임혜신 <시인>

<Paul S. P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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