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54)Watergate 민주당 사무실 잠입사건②

2019-04-15 (월) 조태환/ LI 거주
크게 작게
Woodward 와 Bernstein 두기자는 이 요상스러운 사건을 심층취재하여 10월초부터 Washington Post 에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두기자의 보도는 11월초의 대통령선거에서 Nixon 이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재선된 이후에 폭발한 시한폭탄이었다.

Washington Post 의 Watergate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보도로써 백악관의 배후 관여 여부에 대한 국민들의 의심의 눈초리가 점차적으로 따가와지기 시작하자 상원은 1973년 1월에 77 대 0 으로 1972년의 총선거에서 “불법, 부당, 비도덕적인 행위가 있었던지 여부를 조사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North Carolina 주의 민주당 Sam Ervin 상원의원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특별위원회의 활동은 “The Greatest Show” 라고 불리우면서 5월 17일부터 수개월동안 TV 생중계로 방영 되었었다. 특별위원회의 청문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Nixon 과 그의 보좌관들은 삼면에서 위협을 느끼게 되었었다. 만일 Watergate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중 에서 아무라도 판사, 검사, 특별위원회들중 어디에게 라도 입을 열게되면 백악관과 Plumbers 들이 직결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던 것인 까닭이다.


Nixon 과 보좌관들은 “범죄”를 은폐하려고 하였었고 “은폐죄”라는 구덩이는 깊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만약 Nixon 이 이 시점에서 “정치적 실수”를 자인 하였었 더라면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함께 관련자들의 처벌 정도로써 사태가 수습되었을 수가 있었으리 라고 생각 된다. 그러나 백악관이 범법에 관여되어있고 또 대통령이 그 범법사실을 고의로 은폐 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쉽게 받아 넘길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여론의 중압을 느끼기 시작한 Nixon 은 1973년 4월 17일에 사건의 강력한 조사를 명령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자신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1973년 3월 21일까지 몰랐었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었었다. 그는 1972년 6월하순부터 이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무렵에 Nixon 은 Watergate 사건의 은폐에 참여했던 사람들중 일부가 입을 열기 시작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한 그는 Richard Kleindienst 법무부장관으로 부터 검찰이 Haldeman, Ehrlichman 등 두 비서관들과 Mitchell 전 법무부장관을 기소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그 자신도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을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사태는 “Nixon 일당”의 일괄적인 구제가 아니라 각자가 우선 제살길을 찾아 나서야 되도록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백여만불의 자금을 쓸수도 있고 대통령 사면권도 행사할수 있다는 말을 흘렸었다고 한다. Nixon 은 4월 29일에 그동안 충직했던 Haldeman, Ehrlichman 등 두 비서관을 의리도 없이 마치 문책이라도 하는듯이 해임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Elliot Richardson 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다. Richardson 에게 Watergate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를 임명하라는 임무가 주어 졌었다. Richardson 은 Harvard 대학교의 법학 교수 Archibald Cox 를 특별검사로 임명 하였다.

한편 상원의 Ervin 특위 (Sam Ervin 위원장의 특별조사위원회) 는 1973년 5월 17일에 TV로 생방송이 되는 청문회를 시작하였다.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시청하는 가운데 3개월여 계속되었던 이 “Greatest Show” 의 청문회 조사에서 Nixon 주변의 각종 쓰레기 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적명단, 현금수수, 치사한 술책, 회사들로부터 불법적으로 모금한 수백만불의 비자금, 국세청을 이용한 정적들의 세무감사등등”이 노출되었다. 또 특위의 조사과정에서 7월 13일에 John Dean 대통령 법률보좌관은 대통령 집무실에 자동녹음기가 설치되어서 1971년 2월부터 모든 대화가 녹음되어 있다고 진술하였다.

Nixon 은 월남전쟁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해설이 잘못 되었거나 왜곡된것들이 많다고 불평하여 왔었고 후세 역사가들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대화의 녹음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 했었다고 한다. 그 녹음들이 역사의 중요한 증거물들로 쓰여지기는 하였지만 Nixon 이 기대했던것 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녹음 tape 가 있다는것이 알려지자 상원특위와 Cox 특검 양쪽이 다 녹음 tape 의 특정부분을 들어볼것을 요구하였으나 Nixon 은 그의 대화가 비밀로 보존되지 않으면 대통령집무를 수행할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서 tape 를 건네주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법원에 제소 되었었고 연방 고등법원은 10월 12일에 “대통령이 전국민에 의해 선출된 전국민의 대표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법률위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라고 5대2로 tape 를 일주일안에 내어 놓도록 판결하였다. 이제 Nixon 은 일주일내에 tape 를 내어놓던지 대법원에 상소하던지 또 다른 방도를 모색해 봐야 하도록 되었었다. 이때쯤 “업친데 덥친”격으로 뇌물수수죄로 Agnew 부통령이 사표를 내고 Ford 하원 원내총무가 후임 부통령으로 선출되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Israel 에서는 Yom Kippur War 가 일어났었 는데 그 두가지 일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설명한바 있다.


우리 옛날 동화중에 “혹떼러 갔다가 혹붙이고 돌아온다”는 상당히 수준높은 교훈이 들어있는 우스개 동화가 있는데 Nixon 도 서툴게 혹을 떼어보려고 하다가 혹이 더 커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 내어놓은 궁여지책이 었지만 국민을 얕잡아 보고 한 행동이라고 볼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그에 대한 여론이 더욱 나빠지도록 만들었던 일들을 하였다.

첫째로 Nixon 은 금요일이었던 10월 20일에 ”Watergate 사건으로 국력이 너무 낭비 되고 있읍니다” 라고 마치 방귀를 꾼 사람이 낯을 찡그리는 주변 사람들을 나무라는것 같은 훈계쪼의 말투로 시작한후에 “tape 문제에 대해서는 나의 타협안을 내어놓습니다” 라며 마치 법원의 명령을 흥정꺼리쯤으로 생각하는듯한 말을 하였다. “녹음 tape 를 내어놓기 보다는 녹음 tape 의 내용을 요약해서 제출하겠다” 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Nixon 은 자신이 Cox 특검에게 녹음 tape 제출요청을 즉시 중단하라고 명령하였 다고 말하였다. 소매치기가 손에 채워진 수갑을 풀으라고 형사의 따귀를 때린격이 랄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인 토요일에 Cox 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녹음 tape 를 제출할것을 요구하였다. Nixon 은 Richardson 법무장관에게 Cox 를 파면 시키라고 명령 하였다.

Richardson 은 Cox 임명당시 상원과 Cox 에게 특검활동에 법무부 장관이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사실을 이유로 들면서 Cox 의 파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법무부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Nixon 은 법무부 차관에게 Cox 를 파면할것을 명령하였으나 차관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퇴하였다. 결국 Nixon 은 법무부의 제3인자인 Robert Bork Solicitor General 에게 Cox 를 파면할것을 명령하였고 Bork 가 Cox 를 해임하였다.

Solicitor General 은 국가상대의 재판이 있을때 대법원에서 정부를 변호하는 직책인데 후일 Bork 는 Reagan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상원의 인준을 받지 못하였다.

이 토요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두고 미국사람들은 “토요일의 대학살” (Saturday Massacre) 라고 불렀다.

국민들의 반응을 재고해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Nixon 은 최후 발악같은 잘못을 저질 렀던 것이다. 국민들의 눈에는 대통령이 유죄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창립이후 50년동안 한번도 사설을 계제하지 않았었다는 Times 잡지는 처음으로 쓴 사설에서 “대통령은 사퇴 해야 마땅하다” 라고 역설하였었다고 한다.

<조태환/ LI 거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