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난이 죄가 되는 또 다른 이유

2019-04-03 (수) 12:00:00 조윤성 논설위원
크게 작게
10여 년 전 브루킹스 연구소가 내놓은 미국 빈민층 실태 연구는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다독임의 허구성을 폭로한 기념비적 연구로 꼽힌다. 브루킹스 연구소는 12개 도시의 가난한 미국인들이 떠안고 있는 부당한 경제적 부담의 실태를 낱낱이 조사해 발표했다. 연구의 결론은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치러야 하는 대가가 혹독하다는 것이었다. 가난은 마치 ‘자가 면역질환’처럼 빈곤한 이들의 경제적 처지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들 쉽게 말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난이 죄가 아니던 시절이 있기는 있었다. 중세 봉건주의 시절 빈민들은 자선과 구호의 대상이었다. 이런 빈민들을 돕는 것은 신에게로 가는 구원의 길로 여겨졌다. 빈민들은 업신여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근대사회에 들어서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점차 낙오자로 취급된다. 가난은 그것이 초래하는 당장의 곤궁함과 불편을 넘어 깊은 정서적 상처와 모멸감을 안겨주는 굴레가 됐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단지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에 떠안아야 하는 경제적 부담까지 상당하다니, 왜 한번 가난의 굴레에 갇히면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지 조금 설명이 되는 것 같다.


브루킹스 연구소가 빈민층 거주지역을 빗대 ‘게토 택스’(ghetto tax)라고 이름 붙인 ‘가난세’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저소득층의 대출금리는 중산층보다 보통 2%P 정도 더 높고,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 자동차 보험료 또한 같은 차종을 가진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 연간 수백 달러 더 높은 게 일반적이다. 그로서리 가격에서부터 급전을 빌리는 데 따르는 살인적 이자까지 가난하기에 떠안아야 하는 불이익의 사례는 끝도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후의 사회안전망이 돼야 할 소셜시큐리티 수혜에서도 가난한 계층은 대단히 취약한 처지에 놓여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평생 소셜 수령액은 가난한 사람들의 수령액보다 훨씬 많다. 가난한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들보다 소셜 세금을 덜 내고, 평균 수명도 5년 이상 짧은 만큼 총 수령액이 적은 건 당연하다.

문제는 그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나온 한 조사에 따르면 상위 20% 소득계층의 총 수령액은 1930년생 22만9,000달러에서 1960년생 29만5,000달러로 늘어나게 되는 반면, 하위 20% 계층은 1930년생 12만6,000달러에서 1960년생 12만2,000달러로 오히려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계산 결과는 소셜시큐리티의 본래 취지와 크게 어긋난다.

소셜시큐리티는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노후를 돕기 위해 도입된 복지제도다. 하지만 실태는 이것과 동떨어져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 적은 액수를, 더 짧은 기간 동안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복지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손을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진성’의 회복이다. 현 제도에 따르면 66세에 풀 베니핏을 받는다. 이것을 70세까지 늦추면 32%를 더 받게 된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당장의 생계 때문에, 혹은 건강문제 때문에 조기수령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누진성의 회복은 조기수령 액수와 만기수령 액수를 재조정해 조금 일찍 받아야 하는 형편의 사람들을 배려하자는 얘기다.

연방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이번 회기에 소셜시큐리티 개혁안건을 다룬다는 계획으로 있다. 수혜액수를 전체적으로 약간 올리면서 가난한 계층의 최소혜택도 높이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온 미국인들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이 문제가 손쉽게 타결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공화당의 반대 또한 불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굳게 믿는 것은 가난의 절망과 빈부격차가 더 이상 방기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소득격차는 큰 폭의 수명격차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소셜 수혜 격차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점차 구조적인 문제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치적 개입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생각하는 정치의 역할이자 책무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