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으깬 콩 한 접시’

2019-04-02 (화) Susan Te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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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깬 콩 한 접시’

황하진 ‘무제’

어떤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지, 운명적으로 말야
아마 내가 그중 한 사람이야
지나온 세상의 여기 저기,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을 좀 봐

꿈 속에선 그래도, 행복이
한 여자에게만 주어 졌었지
으깬 콩을
달빛 아래 밤새 놓아두는 여자

하지만 미신은 무슨 달 아래 놓아야 하는 지
그것을 먹어도 되는 지를 알려주지 않아.
정보가 불분명해. 아무도 먹지 않은 콩과
어두워지는 달


하지만 행복은 아직 오지 않았어.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묻고 싶어
하지만 할머니는 팔꿈치를 굽혀 오븐의
온도를 재며 말했었지

행복은 케익을 굽는 일이라고
다 될 때까지

Susan Terris ‘으깬 콩 한 접시’
임혜신 옮김

달빛 아래 으깬 콩을 밤새 놓아두면 행복해진다는 미신이 있나 보다. 모든 미신에는 인류학적 의미가 있으니 이 비법에는 먹을 것을 동물과 나누라는 뜻이 있는 걸까. 그것까지 나는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럴 것이라는 상상에 머물기로 한다. 으깬 콩 비법으로는 얻지 못한 행복을 할머니에게서 찾는 시인. 케익을 굽는 것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만사에 행복해할 확률은 당연히 높다. 행복은 행복해 할 줄 아는 이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니까. 으깬 콩을 보름달 아래 놓아야 하는 지 그믐달 아래 놓아야 하는 지도 알려주지 않는 애매한 미신에 견줄 바 없이 확실한 행복의 비법이다. 임혜신 <시인>

<Susan Te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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