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52)제37대 Richard M. Nixon 대통령⑩

2019-04-01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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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xon 의 지지자들은 만일 그때에 Nixon 이 대통령이 아니었었다면 미국이 그와같은 용맹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Nixon 을 극찬하고 있다.

Yom Kippur 전쟁에 참여한 미국에 대한 반발로 OPEC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은 원유가를 389% 나 인상하였다. 석유를 많이 쓰는 모든 공업국가들이 타격을 받았고 국제무역에도 심각한 영향이 있었는데 저렴한 중동의 원유가에 의존해오던 미국은 치명타를 맞아서 inflation 이 시작되고 그후 10여년간 불경기를 경험하게 되었었다. 도매물가가 1974년에 18% 가 오르고 1975년에는 실업률이 8.5% 로 올랐으며 GDP 가 1974년에는 2%, 1975년에는 3%씩 각각 줄어 들었었다.

그러나 그때의 세계적인 유류파동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유류절약과 대체연료 개발에 대한 연구들이 박차를 가하게 되었었다.


Spiro T. Agnew 부통령의 사임과 Gerald R. Ford 부통령의 임명
“화불단행” 은 동양의 격언이지만 진리는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는것 같다. 사면초가 속에서 고전을 하고 있던 Nixon 은 그와함께 첫번째 임기를 잘 보낸 Agnew 부통령의 “뇌물수수사건” 이라는 치명타를 맞게된다. Agnew 부통령은 원래 공화당내에서 liberal 계통의 인물이었는데 Maryland 주지사를 하는 동안에King 목사와 여러 성분의 흑인지도자들이 이끄는 민권운동과 월남전 반대, 청소년들의 분별없는 반항등으로 미국의 사회질서가 극도로 혼란해지기 시작하자 공권력을 막강하게 발휘하여 폭동, 시위들을 잘 진압하였었다. Agnew 는 곧 “Law and Order” 의 대변자로 명성이 나기 시작하여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었고 그 덕택에 Nixon 의 부통령후보로 발탁되어서 4년간의 부통령 임기를 잘 치루고 제2차 임기에도 발탁되었던 인물이다.

보수쪽 사람들에게는 민권운동이던 반전 항의이던 간에 격렬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강력한 공권력으로 가차없이 단속해서 “Law and Order” 의 상징같았던 Agnew 부통령이 실은 Maryland 주지사를 하는 동안에 주정부의 공사 낙찰자들로 부터 상습적으로 뇌물을 받아 왔었고 부통령이 된후에도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범죄증거가 확실한 것만 자그만치 40 여건이 넘었었다고 한다.

Agnew 의 뇌물 수수사건은 그것만으로서도 Nixon 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지만 마침 그무렵에 Watergate 사건으로 Nixon 에 대한 상하양원의 조사와 탄핵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을때 이었었던 까닭에 공화당은 더욱 극심한 정치적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미국헌법에 대통령 승계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없었던 때에 Eisenhower 대통령이 몇번 중병을 앓고 나자 미국 사람들은 헌법의 헛점을 심각하게 깨닫게 되었었다. 1967 년에 불야불야 미국헌법 개정25항이 입법되었다. 이 개정에 따라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의식불명등으로 대통령 임무를 수행할수 없을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도록” 하였으며 혹시 대통령이 “정신이상” 이라도 되었을 경우에 부통령과 국무위원 대다수가 동의하면 “대통령의 직무수행 불가”를 결의하여 상하원 의장들에게 보고한후 부통령이 대통령직무를 대행할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런 경우에 대통령이 자신이 직무수행을 할수 있음을 상하원 의장들에게 통지하고 “복권”을 할수 있으나 국회는 3분지 2의 의결로 어느쪽이 집권할 것인지를 결정할수 있다. 또 이 개정조항에 따라 부통령직이 공석이 되었을 때에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받아 부통령을 임명할수 있도록 되었다.

만일 대통령과 부통령이 동시에 공석일때에는 하원의장이 대통령직에 승계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백악관이 기습적으로 폭격이나 받기 전에는 정상적으로 볼때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일이다.

이무렵에 Watergate 사건과의 연관을 핑계하여 Nixon 은 대통령 비서실장 H. R. Haldeman 을 “의리”도 없이 해임하고 Alexander Haig 장군을 비서실장으로 임명 하였었다. Agnew 의 뇌물사건이 발각되어서 검찰이 그를 기소할 준비를 하고 있을때에 국회에서는 Agnew 부통령도 “탄핵”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만일 대통령, 부통령이 다 탄핵으로 파면이 되어버리면 민주당 소속의 Carl Albert 하원의장이 대통령으로 승계하게 되어있었다. 이제는 Nixon 개인이나 Agnew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가 아닌 방법으로 정권이 합법적으로 야당에 넘어 가게 될수도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사태의 긴박성을 판단한 Haig 는 Agnew 에게 자진사퇴할것을 요구하였다. 심각한 타협끝에 Agnew 가 자진사퇴를 하기로 하면 검찰은 탈세 한건만으로 기소하여 체형은 면하고 벌금형만 받도록 plea bargain 이 되었다. Agnew 는 1973년 10월 9일에 “자진사퇴” 하였다. 그는 벌금 1만불만 내고 체형은 면하였었다.

이제 공화당과 Nixon 은 후임 부통령을 임명하는 것이 아주 급박해 졌었다. Nixon 은 민주당 소속의 Texas 주지사로써 JFK 암살당시 같은 차에 타고 있다가 손에 총상을 받았었던 John Connally 를 부통령으로 임명하고자 하였는데 국회의 동의를 얻는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Connally 는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꾼후 Nixon 의 재무부장관을 했었었다. 공화당 인사로써 국회의 동의를 무난히 받을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당시의 하원 원내총무 Gerald R. Ford 의원이었다. 1973년 12월 3일에 Ford 는 헌법개정 25항에 의해 최초로 임명된 부통령이 되었다. Ford 에 대해서는 그의 대통령 시기에 얘기를 차후 상세하게 쓸 예정이다.

Nixon 은 미국역사상 최다수의 득표차로 1972년 11월의 총선에서 대통령에 재선 되었다가 21개월만에 “자진사퇴”한 유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은 “통치불능의 정치 상황 에서의 강제사퇴” 이었던 Nixon 의 사임은 근대 미국역사상 가장 심각한 사건들중의 하나이다. 권한의 점차적인 강화로 “제왕적인 대통령이 되어가고있던 추세”에 급 brake 가 걸려서 삼권분립이 재활성화 되었으며 “대통령의 자질에 관한 새기준”이 설정된 일이었 었다.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졌지만 대통령도 법위에 있지 않다는 미국의 전통이 재확인되었고 그 결과로 여러가지의 제도개혁도 뒤따랐었다.

Watergate 사건이 미국역사상 중요한 이정표가 된것은 분명하지만 그사건을 하나의 연극으로 평론해 보자면 B급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 서툰 연출가가 공연연습도 제대로 하지않은 배우들을 등장시켜 C급 comedy 로 끝난것 같다고 할수 있다. 앞으로 몇회에 걸쳐 Watergate 사건에 대한 글을 읽으시면서 “무슨 이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로 지면을 낭비하나?” 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으시리 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을 읽다가 보면 발상과 행동들에서 “유치”한 점들도 많이보이고 상당히 comic 스러웁기도 하다. 우리는 전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게되고 법과 제도가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 의해서 맥없이 남용되는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헌법이 살아 있는것도 보게되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충직한 언론과 사법관리들의 양심과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경험하게 된다.

Nixon 자신은 전혀 모르는채로 대통령 비서관 John Ehrlichman 의 허가를 받아 Pentagon Papers 의 유출자인 Daniel Ellsberg 의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에 Plumbers 들이 잠입했던것이 불법 범죄인 “Watergate 사건”의 시작이었었 다고 볼수 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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