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느낌’에 ‘당신 견해’ 는 사절

2019-03-1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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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볼만한 영화가 없을까 하다 요즘 흥행 초대박을 터뜨린 영화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관람객들과 평론가들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고 있었다. 관람객들의 영화 평점은 흥행작답게 9.21의 높은 점수였으나 평론가들과 영화 전문기자들의 평점은 고작 6.80에 머물렀다. 이 영화만 그런가 하고 다른 상영작 몇 개를 더 살펴봤더니 마찬가지였다. 유관순의 수형생활을 다룬 영화에 대해 관람객들은 9.43의 높은 점수를 줬지만 평론가들은 6.20으로 아주 인색했다.

영화를 보는 대중의 눈과 전문가들의 시선이 엇갈린다는 것은 새삼스런 사실이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영화를 보며 재미를 최우선으로 하는 보통의 관람객들과, 영화를 분석과 비교의 대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평론가들의 평가가 다르게 나오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극과 극의 평점이 나온다면 대중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한 영국신문은 미국의 유명 영화평론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의 영화 평점을 조사해 대중과 평론가들의 평가가 가장 크게 엇갈린 영화들을 골라 순위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는 대중이 89점과 84점, 그리고 77점을 준 영화에 평론가들이 0점을 준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평론가들이 100점을 줬지만 관객들은 겨우 20점과 34점을 준 영화들도 있었다. 이쯤 되면 “평론가들이 좋다고 하는 영화치고 재미있는 경우는 드물고, 이들이 재미없다고 하는 영화는 재미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감각이 지배하고 주관적 판단이 크게 작용하는 영역에서는 전문가들과 일반인들 시선 사이에 이처럼 넓은 간극이 존재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중의 기호나 소비행태가 전문가 혹은 권위자들의 평가와 항상 궤를 같이 하지는 않는다. 영화와 음악, 그리고 패션 등이 그런 분야들이다. 흥행영화에서 종종 드러나는 B급 정서에 대한 대중들의 환호가 평론에서는 그리 고상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런 불일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한 분야가 와인의 세계이다. 와인 업계에서는 전문가들의 입김과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게 작용한다. 문제는 전문가들의 평가와 일반 대중의 입맛이 엇갈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

‘푸드 퀄리티 앤 프레퍼런스(Food Quality and Preference)’라는 잡지가 아마추어 와인애호가들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테이스터들을 대상으로 27종류의 와인을 맛보고 평가하도록 한 결과, 일부 와인의 경우 아마추어들의 선호 패턴과 전문가들의 패턴이 완전히 정반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신이 아마추어 와인애호가라면 전문가들이 높은 평점을 준 와인이 오히려 입에 맞지 않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얘기다.

테크놀러지가 발달하면서 좋은 와인과 나쁜 와인의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와인에 넣을 수 있는 첨가물이 무려 6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소비자는 드물다. 와인제조업자들은 끊임없이 소비자 입맛을 분석하고 첨가물을 넣거나 빼면서 가장 보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들어 내려 노력하고 있다.

“가장 싸구려 와인과 가장 비싼 와인의 가격 차이가 지금처럼 컸던 적이 없었듯이, 두 와인 사이의 품질 차이가 지금처럼 적었던 적도 없었다”는 한 와인 비평가의 지적은 ‘와인의 민주화 선언’처럼 들린다. 그러니 자기 입맛에 맞는 와인을 앞에 놓고 와인에 뒤따라 다니는 전문가들의 평점에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문가들의 평론과 평가에는 엄숙주의가 배어있는 경우가 많다. ‘권위자 편향’ 때문인지 이들의 조언과 견해에는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권위자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분야와 이슈들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를 즐기고 와인을 마시는 일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다. “취향의 선진적 계층으로서, 소양이 부족한 일반 대중에게 작품을 매개 한다”는 평론가의 교과서적 역할은 인정한다 해도, 감성이 지배하는 우뇌 영역의 반응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 일일이 이들의 견해를 궁금해 하거나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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