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37대 Richard M. Nixon 대통령(7)

2019-03-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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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처 몰랐던 토막얘기들 (249)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표수 차이로 Nixon 에게 승리한 John F. Kennedy 는 정치적 경력으로 비교해 볼때에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었다.

많은 사람들은 JFK 라는 이름을 들으면 “젊고, 참신한, 지성적, 문화적, witty, smart, 먼 앞날을 내다보는 진보적” 정치인쯤으로 온갖 근사한 형용사들을 연상하는데 보수, 공화당측에서 보는 JFK 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 었다고 한다.

1960년의 선거에서 정치9단이 초단에게 부정한 심판으로 패배 당했다고 생각하는 공화당쪽의 주장은 JFK 에 대한 좋은 image 들이 진보성향의 주류 언론매체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JFK 가 Harvard 대 학생이었을때 쓴 논문이 책으로 발간된것은 부자 아버지 덕택이었고 실은 신문과 잡지 scrap 을 주어 모은 수준이었 다는 것이다.


상원의원때 병상에서 보낸 6개월간에 썼다는 “Profiles in Courage” (용감한 정치인들) 이란 책은 Pulitzer 상 까지 받았지만 “팔렸다”는 10만권의 책자들은 Kennedy 가의 창고에 쌓여 있었고 책도 남이 대필해 주었다는 소문 때문에 명예훼손 소송사건 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JFK 의 친조부, 외조부가 Boston 정계를 움직이던 사람들이 었었는데 Boston 시장을 지낸 외조부의 딸인 어머니 Rose Kennedy 여사는 언행이 항상 명문집 사람 같았었다는데 비해 부친 Joseph Kennedy 는 사업을 할때 부당한 거래도 서슴치 않았었고 금주령 시절에 주류밀수로 돈을 많이 벌었으며 증권거래에 대한 통제가 없었을때에 투기적인 방법으로 증권투자에서 치부를 하여서 매자녀당 2천만불짜리 신탁구좌를 열어줄 정도의 거부가된 사람이었다.

Joseph 는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해볼 욕망까지 있었던 인물인데 FDR 대통령 에게 정치헌금을 많이 하여서 초대 증권거래 위원장을 지냈었고 Irish 사람으로는 상상해 볼수도 없던 주영 미국대사도 했었었다. Joseph 는 장차 대통령으로 출세 시키려고 계획해 왔던 큰아들이 제2차 세계대전중에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를 하자 둘째아들 John 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로 결심 하였었다고 한다.

JFK는 Joseph 이 항상 배후에서 조종했었다 는데 좋은 집안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몰락했던 집의 딸 Jackie 와의 결혼도 Joseph 의 주선 으로 이루워 졌다고 한다.
생업으로 무었을 해야할지도 모르고 있었던 “건달 바람둥이” 이었었던 JFK를 하원의원으로 당선 시킨것도 Joseph 이었다고 한다. 같은 Boston 출신의 Tip O’Neill 하원의장의 회고에 의하면 JFK 의 첫 하원의원 출마때에 가정당 50불씩을 주어서 투표를 매수하였다고 하며 Joseph 은 신문들이 친 JFK 가 되도록 설득하였으며 설득이 않되는 언론은 주식을 사들여서 친 JFK 로 만들었었다고 한다.

1960년의 민주당 대통령후보 공천에서 Hubert Humphrey 상원의원과 경쟁을 했던 JFK 는 초기에 있었던 West Virginia 의 공천대회때 불법적으로 선거자금을 뿌려서 일찌기 기선을 잡았었다고 한다.

Nixon 을 상대로한 본선거가 시작되자 JFK 가 “천주교인 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Joseph 는 절친했던 Boston의 Cushing 추기경의 협조로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의 종교를 문제삼지 말아달라”는 서한을 100불내지 500불과 함께 동봉하여 개신교 목회자들 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사실은 선거가 백중지세에 있던 주들에서는 천주교인들이 JFK 에게 몰표를 모아주어 도움을 받았었다고 한다.

더욱 ironical 했던 일은 Nixon 이 JFK 의 종교를 선거운동중에 문제화 하지 않았었고 낙선후에도 “우리가 선거운동중에 종교를 문제화 하지 않은것은 참 잘한일 이었다” 라고 말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0년의 선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문제는 투표부정이 있었다는 주장 이었다. Nixon 은 불과 10여만표의 차이로 JFK 에게 낙선 하였었다.
그런데 Illinois 주의 정계를 주름잡고 있던 Chicago 의 Richard Daley 시장이 Illinois 주의 투표과정에서 41만표를 JFK 에게 가도록 조작 했다는 것이었다.

JFK 의 부통령 후보였던 Lyndon B. Johnson 상원의원의 출신구인 Texas 주에서도 10만표의 유령투표가 나왔다는 소문이 자자하였었 다고 한다. Nixon 측근들과 Eisenhower 대통령까지 투표결과를 재검표 하도록 요구하라고 Nixon 에게 권고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의 재검표에 필요한 16개월 동안에 미국의 국정에 큰 혼란이 올것을 우려한 Nixon 은 “애국심”에서 재검표 요구를 하지 않고 일차 개표결과를 감수하였었 다고 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때에 Nixon 이 어떻게 처신을 하였어야 옳았을 것인지는 연구해 보아야 할 일이다.

Nixon 은 grocery store 주인의 아들로써 집안배경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인데 다가 시골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 경제적 여유도 없었었고 부통령이 되기까지 모든것을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대통령까지 해보겠다는 불굴의 집념이 그의 정치행로를 인도하였을 것이며 어쩌면 그의 “열등감” 비슷한 자의식이 그를 평생을 긴장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 되게 하지 않았을가 라고도 생각된다. 상하원의원과 부통령을 지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고했던 보수적 성향은 진보성향의 Washington Post, New York Times 등의 신문과 Times, Newsweek 등의 잡지들과 거의 모든 TV 및 라디오 방송들의 성향과 맞지 않는것 이어서 항상 껄끄러운 관계가 지속되었었다.

이들 “elite” 의식이 강했던 진보적 언론들은 Nixon 을 출신이 빈약한 서부의 “outsider” 로 생각하여 그에게 예리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진영이 선거에서 패배한후 선거 이외의 수단으로 Nixon 을 실각 시키려고 그에게 gang up 을 하였었고 결국은 정략적으로 대통령직 에서 쫓아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적대적인 언론에 둘려 싸여있다고 생각했던 Nixon 은 언론인들의 어깨넘어로 눈에 보이는, 자기를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대다수의 국민들, 소위 “Silent Majority” 에게 직접 호소해 보려고 노력 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자신이 “속았었다” 라는 생각과 앞으로는 모든 일을 정말 물샐틈없이 철저히 대처하겠다는 뼈아픈 인생철학이 더 굳어졌었던것 같다. 선거 여건이 좋았던 1972년의 대통령선거에도 빈틈 없는 선거“투쟁”을 하기로 작심했었던것 같다. 그의 이와같은 각오는 그의 주변의 사람들 에게도 무언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Nixon 의 Enemy List 에는 민주당, 진보계 인물들, 반월남 전쟁주의자들, Washington Post, New York Times, Times, Newsweek, 모든 주요 TV 방송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Enemy 들은 탈법적인 수단을 쓰더라도 감시하고 손보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듯 하다. “미국적인 대통령” 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자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972년도의 정치현상은 Nixon 의 재출마에 아주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Nixon 이 신경과민일 필요 가 전혀 없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충분히 재선될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하급 수준의 대통령들의 공과에 비해 볼때에 첫임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내었었다.
그는 중공과의 얼어붙었던 외교관계를 재활시켜 악화일로에 있던 역사의 방향을 돌려 놓았으며 동시에 쏘련과도 정상회담을 통하여 오랫동안 협상만 해오던 군비축소를 포함한 중요한 국제조약들을 체결하여 국제관계 긴장을 완화시켰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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