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2019-03-06 (수) 남상욱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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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너 그 동안 남자 생겼니? (여자 J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왜 이러느냐? 너의 이러한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1990년대 한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영화였던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의 한 장면 대사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온 R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허울과 그럴듯한 말의 성찬 속에 가려져 있는 원초적인 본능이 ‘너의 이데올로기는 뭐냐’라는 대사에 담겨져 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철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어 온 주제 중 하나로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는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출발했다.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고착화되고 유지되는 이면에는 이데올로기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과정이 존재하며 각종 사회제도와 문화적 장치들이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에 동원된다는 논의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우리들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이를 전달하는 데 일종의 매개 수단이 된다. 그래서일까, 이데올로기는 이제 단순히 ‘세계관’이나 ‘~주의’라는 말과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경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국가의 경제를 움직이는 대통령의 이데올로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미국 우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통상 정책에서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주장한다. 세금과 관련해서는 대대적인 감세 정책이 특징이다. 세금을 대폭 줄이고 기업과 은행의 규제를 없애 미국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3년차에 들어선 미국 우선주의는 어떤 모습일까. 미국 경제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경제적인 삶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 워싱턴 D.C. 싱크탱크인 ‘어번 인스티튜트’(Urban Institute)가 최근 발표한 연구 결과 지난해 중산층 3분의 1 가량이 월 400달러의 여유 자금도 없어 비상 상황 발생시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재정 불안 상태에 있다. 실질적인 소득이 줄어들면서 주택 렌트비나 의료비를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살림살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미국 중산층의 삶이 됐다.

소득의 불균형도 더 커졌다. 영국BBC에 따르면 미국에서 소위 ‘잘나가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약 1.52일이면 일반 노동자의 연봉을 벌어들일 정도다. 이틀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일반 노동자들의 평균 수입 비율도 265대 1로 세계 최고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향후 10년간 미국이 직면할 가장 큰 경제 난제로 소득 불평등과 생산성 둔화를 꼽은 것도, 2021년이 끝나기 전까지 미국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며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상황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거시적 경제 전망과 비교하면 세금보고 후 환급금이 지난해에 비해 줄거나 오히려 토해내야 한다는 불만이 늘어난 것과 10달러짜리 점심 메뉴가 부족해 늘 어디서 뭘 먹을까를 걱정해야 한다는 하소연이 오히려 귀엽게만 여겨지는 것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그래서 다시 한번 묻는다. ‘너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남상욱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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