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관계를 파괴하는 정치적 증오

2019-03-06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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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신문기사들에 붙는 댓글들 가운데는 감정적 찌꺼기를 쏟아내는 듯한 내용들이 적지 않다. 특히 정치적 견해가 드러나는 글에는 어김없이 적대적이고 증오에 넘치는 댓글들이 잇달아 붙는다. 댓글들끼리 벌이는 공방 속에서 합리적인 주장과 건강한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주에 가까운 비난과 조롱들로 넘쳐난다. 이런 태도는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똑같다. 익명성 뒤에 숨어 상대를 향한 증오를 거친 언어로 분출해 낸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싸움이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타자를 전제로 이뤄지는 행위다. 서로 다투고 협력하고 또 거래하면서 차이를 조금씩 메워나가는 것이 ‘좋은 정치’다. 그런데 이런 정치는 지금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정치의 형태는 시대정신과 궤를 같이한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정치는 협력과 공생의 전형이었다고 할만하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기는 했지만 국민복리라는 목표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입장을 거의 같이했다. 상호타협에도 적극적이었다. 초당적 협력이 일상화 돼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미디어 시대가 본격화된 후 ‘대립의 정치’로 변질되더니 이제는 ‘증오의 정치’가 돼버렸다. 진영 간 싸움에서 논리와 이성은 사라지고 극단의 언어와 억지 주장들만이 판친다. 정치인들뿐 아니다. 정치적 색깔을 달리하는 일반 유권자들 사이의 충돌과 댓글싸움은 더욱 피가 튄다. 통제 수준을 벗어나 이젠 난치병이 돼버린 듯하다.

많은 사상가들은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인간을 전제로 정치를 논해왔지만 실제로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우리가 정치인들을 선택해 사랑하고 표를 던지는 행위 모두에는 냉철한 계산보다는 감정이 절대적 역할을 한다. 문제는 감정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져버렸다는 데 있다.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인터넷과 SNS이다. 인터넷과 SNS의 가장 큰 특징은 속도이다.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쏟아져 나오는 뉴스와 견해들 속에서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있다. 이성과 논리는 감정을 뒤늦게 정당화 시켜주는 도구일 뿐이다.

속도는 감정의 빠른 반응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감정의 독재’가 시작된다. 감정의 노예가 돼버린 사람들에 의해 인터넷과 SNS는 손쉽게 증오의 공간이 돼버린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은 날로 견고해지고 상대에 대한 분노와 증오 또한 그에 비례해 커진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댓글세계가 바로 그렇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게 분열적 인물들의 등장이다. 이들에 의해 유권자들은 한층 더 분열적이 되고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게 된다. 트럼프 이후의 미국사회를 보면 된다. 트럼프 등장 이후 많은 미국인들의 인간관계가 어그러지고 있다.

최근 퓨 리서치 결과를 보니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대선 때문에 친구 혹은 가족과 대화를 끊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미국인이 거의 3분의1에 달했다. 트럼프 때문에 헤어진 젊은 연인들과 부부들, 그리고 정치적 견해가 다른 딸 자매가 서로 말조차 섞지 않아 어떻게 가족여행을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한 엄마의 하소연에 이르기까지 가정과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관계파탄 스토리는 끝이 없다.

“오바마 때도 정치적 견해 때문에 상대를 미워하고 ‘인종주의자’ ‘사회주의자’라고 서로 비난은 했지만 지금처럼 상대를 ‘악’으로까지 규정하지는 않았다”는 퓨 리서치 관계자의 말에는 분열적 인물로 인해 점차 망가지고 있는 미국사회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다. 정치적 이견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개인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이런 논쟁에서는 이기는 게 다가 아니고, 또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기억한다면 관계손상까지는 가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인터넷상에서 익명성 뒤에 숨어 건강한 비판이 아닌, 저급한 증오의 욕설을 날리고 싶은 유혹이 고개를 든다면 가상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한번 비춰보기 바란다. 인간의 수준은 남이 아닌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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