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전에 “보수주의자들”의 “진보적”인 대법원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쪽이 이점에서 보수적이 었었는데 Nixon 도 대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청신호를 켜주는 경우가 많이있고 “과격한” 학교인종 통합을 억제하기 보다는 독려하고 있다고 비난 하였었다.
그는 1968년의 선거유세 에서는 대법관으로 “헌법협의 해석자”들 만을 임명하겠다고 공약한후 1969년에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Warren Berger 를 진보적이 었던 Earl Warren 후임으로 대법원장에 임명 하였었다. 마침 연방정부는 Mississippi 주와 연대하여 학교인종 통합을 완하해 줄것을 대법원에 상고중이 었었는데 Berger 대법원은 첫 판결에서 만장일치로 학교통합을 전국적으로 즉시 실행할것을 명령 하였다. 삼권분립은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Berger 이후 Nixon 은 세명의 대법관 후보를 지명하였 었으나 상원은 한명만 인준해 주었지만 대법원이 결국은 보수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서 범죄 혐의자들의 헌법상의 민권을 조금 협의적으로 줄이기 시작하였었다.
Nixon 의 국내정치
Nixon 은 부통령 재임시에 Eisenhower 를 대신하여 국외여행을 많이 하였었고 외교, 국제문제에 직접 관여하기도 많이 하여서 대통령 취임후에도 국제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대중, 대쏘 외교등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었다.
그러나 Teddy Roosevelt, FDR, LBJ 대통령들과는 대조적으로 Nixon 은 국내정치, 경제, 사회의 혁신적인 개혁은 시도하지 않았으며 같은 공화당이었으나 비교적 온건파이었던 Eisenhower 대통령처럼 정부의 예산을 축소하고 연방정부에서 해오던 사업들을 주정부들 에게 넘기려고 하였으며 균형예산을 집행하고 차츰 심각해 지던 inflation 을 억제해 보려고 하였으나 그의 임기내내 민주당이 국회의 다수당이 었음으로 그가 의도 했던대로 정책을 수립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임기동안에 inflation 을 잡고 미국 Dollar 의 국제적 가치를 인상시키고 전쟁중임에도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업적” 도 남겼다. 대통령 평균수준을 넘는 공로가 있었다고도 볼수 있었다.
월남전이 주원인으로 시작된 “LBJ 경제” 를 떠다맡은 Nixon 은 선거유세 때에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inflation 을 잡고 경기를 활성화 시키겠다고 공약 하였었다.
Nixon 은 균형예산을 짜고 가능하면 예산잉여 까지 내 보려고 계획하였으나 국회가 계속 큰지출이 필요한 예산을 작성하고 LBJ 가 제정하였던 소득세부가세가 1969년에 폐지되자 inflation 을 잡기는 더욱 어려워 졌었다. 그때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던 월남전에 막대한 물자가 필요하여서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고 그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불경기가 지속 되고 있었다.
Nixon 은 불경기때에 균형예산을 짠 그의 경제정책이 inflation 을 둔화시킬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1969년 1월부터 1971년 8월 사이에 물가는 14.5% 나 상승 하였었다.
Nixon은 8월에 긴급하게 경제정책을 변경하였다. 그는 8월 중순에 향후 90일간 물가와 임금인상을 금지하는 통제령을 발동하였는데 이 통제령은 대통령이 쉽게 발동하지않는 긴급조치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미국화폐의 “금본위제도”를 철폐하였다.
금본위제도 하에서는 외국이 Dollar 지폐를 금으로 환불하여 줄것을 요구하면 소정량의 금을 내어 주어야 하는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외국들에게 자국의 대Dollar 환률을 높여 줄것을 요구 하였다. Nixon 은 또 수입물품에 대해서 10%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Dollar 환률의 절하와 수입품 관세는 미국의 수출품 가격을 인하시키고 수입물자의 가격인상으로 미국산 물품의 소비가 증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독자들께서는 Nixon 의 수입관세 인상을 최근의 Trump 대통령의 대중국 “협박성” 25% 관세부과와 혼동하지 않으시기 바란다. Trump 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우방인 Canada 와 유럽제국에도 무분별한 수입관세 인상을 하여 불화와 보복관세를 전세계로부터 받고 있으며 중국의 예상되는 경기불황과 미중간의 무역전쟁은 미국을 고립시키고 전세계의 무역전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커서 2019년과 그이후의 미국의 경제가 심히 불안정한 역효과가 나지 않을가 심각히 우려된다.
Nixon 의 경제정책의 선회는 거의 즉각적인 효과를 내었었다고 한다. 1972년도에 inflation 은 3.5% 로 하강하였 었다고 한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에 223억불의 적자예산이 집행되고 1972년도에는 더큰 적자가 예상되는 재정지출 이 예상되자 경기는 날아갈듯이 상승되었고 실업률도 대폭 하락하였 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미국 경제조건의 향상은 월남국민들 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지만 1972년의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 준비를 하고있던 Nixon 에게는 아주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Nixon 대통령은 “자진사퇴”로 대통령직을 떠난지 4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전모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기 같은 인물로 생각되는것 같다. 그의 총체적인 면모가 분명히 나타나기 보다는 반대자들 에게는 “불의의 상징” 으로만 남아 있는것 같고 그의 보수측 지지자들 에게는 수많은 정치적 공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그전의 양당 대통령들이 다 써오던 “정략적 수단”을 썼었다가 요즘 Trump 가 즐겨쓰는 표현인 “Witch Hunting” 적 방법으로 씌운 올가미에 재수없게 걸려들었을 뿐이라고, 억울한 희생자 라고 보여지는것 같다. 그래서 가만히 중립적으로 듣고있다 보면 양쪽 말이 다 수긍이될 정도로 혼돈스러웁기도 하다.
Nixon 은 “오해” 와 “곡해” 를 많이 받는듯도 싶다. 많은 사람들이Nixon 은 “탄핵” 을 받아서 “파면” 된 유일한 미국대통령으로들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Nixon 은 탄핵도 받지 않았고 더구나 파면은 되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탄핵이 되었던 미국 대통령은 세명이 었으나 한명도 상원의 재판에서 파면된 사람은 없다.
Nixon 이 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해서 파면 되었다는 곡해들도 있다. 그러나 1972년의 대선에서 “부정선거”는 없었었고 막상 “Watergate 사건” 등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 났을 때에 Nixon 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다가 대통령직을 강제로 “자진사퇴” 할수밖에 없던 처지까지로 몰리게된 Watergate사건과 기타의 사태들이 일어 나게 되었을까? Nixon 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질 이유가 없는 “역사적인 우연” 에 그가 희생이된 것일까? 끝없는 논쟁이 가능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Nixon 비극”의 책임은 거의 전부 Nixon 자신에게 있는것 같다. 그는 타협을 할줄 모르는, 싸움이 시작되면 이겨야만 하는 “투사” 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었던것 같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우방”이 아니면 “적”으로만 양분 했었던것 같고 “적”은 거의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분쇄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듯 하다
Nixon은 혈맹처럼 신뢰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대신 그가 의심하고 적으로 판단 하였던 사람들은 많았던듯 하다. 아마 그에게 가장 뼈아픈 교훈을 준 사람은 1960년 대선의 적 John F. Kennedy 대통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조태환/ 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