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치수 이야기

2019-02-2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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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은 전설 속 중국의 여덟 임금인 3황5제 가운데 마지막 두 임금으로 둘 다 자식이 있었지만 왕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어진 사람을 후계자로 택해 제위를 물려줬다. 순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것은 우임금으로 자주 범람해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황하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케 했다고 한다.

중국 문명은 황하 일대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들어 이와 비슷한 시기에 사천성 삼성퇴란 곳에서 황하 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 문명이 일어났던 흔적이 발견돼 주목받고 있다. 사천은 티베트에 인접해 있을 정도로 중국 서쪽에 위치한 오지로 중국 전통문명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이런 곳이 옛 부터 비옥한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렸다.

소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제갈량에게 천하의 형세를 묻자 이미 중원은 조조가 차지하고 있고 남쪽은 손권의 손에 있으니 물자가 풍부한 서천(사천의 옛 이름)을 얻으라고 권하는 장면이 있다.


사천은 이름대로 네 개의 강이 있는 곳이다. 이곳도 역시 황하처럼 툭하면 넘쳐 백성들은 고통을 겪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런 수시 범람지역을 풍요로운 곡창지대로 바꿔놓은 것이 도강언이란 관개시설이다. 기원전 256년 진나라 관리 이빙이 만들었다고 하는 이 시설은 물길을 따로 내 강이 넘치려 하면 물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역할을 했고 이렇게 얻은 물은 저장돼 농업용수로 쓰였다. 2,5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시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관개시설로 아직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200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 인근에는 이빙의 공을 기리는 사당이 남아 있다.

4대 문명이 모두 큰 강 일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는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식량을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지했던 고대국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도 물 관리의 중요성은 덜하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물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사막에 가까웠던 LA가 이처럼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1913년 200마일에 걸친 수로를 건설해 오웬스 밸리에 있는 물을 끌어온 덕이다. 그 후 100년 동안 LA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음에도 이에 대비한 수자원 관리가 충분히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10년에 가까운 대가뭄은 수자원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해줬다. 수자원 보호를 위해 절수정책이 시행되고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공장까지 세워지고 있지만 정작 기본적인 수자원 보호정책은 미흡한 상태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빗물을 잡아두는 작업 말이다.

전문가들은 2월 한 달간 가주에 18조 갤런의 비가 내렸지만 이 중 저수지에 보관돼 식수나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비율은 10~20% 수준인 것으로 보고 있다. 내리는 비의 대부분이 강을 통해 바다로 그냥 흘러가 버린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된 것은 과거 인구가 많지 않았던 시절 홍수 방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빨리 물이 빠지는 것을 목적으로 수리시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012년 LA시는 새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강우량의 4분의 3을 재사용하거나 지하수로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조례를 통과시켰고 LA 카운티는 작년 빗물을 저장해 재사용하기 위한 시설 마련을 위해 3억 달러의 재산세를 부과하는 주민발의안 W를 통과시켰으나 이는 작은 출발에 불과하다. 2014년 퍼시픽 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남가주와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빗물만 잘 저장하면 매년 42만 에이커 피트의 물을 더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에이커 푸트는 가주 평균 가정이 1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의 물이다.

다행히 올해는 예년 평균보다 많은 비가 내려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언제 다시 긴 가뭄이 계속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욱이 가주를 비롯 물이 귀한 미 남서부 지역 인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치수는 바른 정치의 근본이다. 더 늦기 전 충분한 물 확보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시급해 보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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