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달팽이 간다’

2019-02-19 (화) 12:00:00 최광임(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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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간다’

성수환‘여름밤’

달팽이 개수대를 기어 오른다
제 살 곳에 살지 못하는 것이 저 달팽이 뿐이랴만
언제 이 사막을 건널 것인가
연유를 묻지 않아도 여기, 지금 이곳
응, 나야 하고 말 걸어 볼 사람 하나 없는 건기의 도시
때때로 절박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직도
그곳엔 바람을 되새김질하는 감자꽃과
해질녘 주인이 전지한 넝쿨에 참외꽃 피겠지만
겹겹의 바람을 쟁이는 치마상추 잎 그늘에
깃들고 싶었을 달팽이를 안다
오늘도 도시는 번화하고 바람이 불었다
모두들 촛불 켜들고 광장으로 나갈 때에도
달팽이 건기의 도시를 횡단하며
자정 가깝도록 서걱서걱 초인종을 눌렀다, 그때마다
내 몸에서는 한 움큼씩 초록물이 빠져나가지만
사막에서도 한 평생 살아내는 몇 종의 동물과 식물처럼
목메어 기다 가다 거기, 어디쯤
스쳐갔을 상추 잎에 스민 바람과 그늘 찾아

최광임(1967- )‘달팽이 간다’ 전문

조그만 달팽이가 어쩌자고 하수구 파이프를 타고 올라와 개수대에 이르러 있는 것일까. 저 먼 길을 한 줌의 흙도 없는 곳으로 찾아 든 달팽이는 고달픈 도시인을 닮았다. 우리도 오래 전 푸른 상추 그늘같은 본향을 나선 후 꿈, 야망, 혹은 정의와 저항과 의무라는 사막같은 길을 이렇게 열심히 걷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불모의 길만이 떠나온 곳을 향한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본향은 바로 여기, 뚜벅뚜벅 걸어가는 당신의 발걸음 속에 피어있는 거라는. 오늘도 이 외로운 길을 참으로 잘 살아내는 이들이여, 당신의 그 쓸쓸함, 그 굳굳함이 가장 아름답고 따스한 본향의 시다. 임혜신 <시인>

<최광임(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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