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첫 사랑’

2019-02-14 (목) 12:00:00 Tom Sle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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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자넷 서‘오솔길’

담쟁이 덩굴을 타고 부스럭거리며 매끄럽게 찾아와
돌아온 죽은 자의 목소리처럼 떠나는;
또 다시, 저 지나간 달콤함을 내 귀에 쏟아넣고
빛없는 층계로 이끌어가는
거미줄 축축한 뿌리의 지하실,
양파, 비트무우, 감자의 지하세계
거친 삼베의 수의를 입은, 접히고 주름진
잔디 덮인, 그곳으로부터 채굴되는 당신의 목소리
숨을 고르는, 신선함
오래된 음조의 쏘는 듯한 채찍의
음계를, 우리가 비밀스레 드나들 때, 나의 혀는
당신의 혀를 감싸고, 비음 섞인 당신의 알토가
나의 테너를 무대로 올린다, 그대가 양파를 사과처럼
휘저어 갈아댈 때: 내 입에 고이는 침, 쏘는 듯
눈물을 흘리게 하는, 달콤한 햐얀 과육

Tom Sleigh‘첫 사랑’ 전문 임혜신 옮김

기억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지하의 깊은 파일 창고로 숨어든 뿐이다. 그 창고에는 첫사랑이라는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도 살고 있다. 죽은 자가 돌아와 잠을 깨우듯 매끄럽고도 또렷하게 다가와 다시 숨을 고르는 그것, 환희와 눈물을 또 다시 뒤섞는 침침하고 뜨거운 하데스의 연가가 여기 있다. 세상 사람들 말하여 천국이며 지옥이라는 사랑. 저 낮고 달콤한 지하세계의 음계같은 한 여인이 비밀의 문을 스르륵 열고 찾아올 때, 첫사랑의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한 한 남자는 사과처럼 양파를 눈물로 쓰다듬으리라. 임혜신 <시인>

<Tom Sle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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