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45)제37대 Richard M. Nixon 대통령③

2019-02-11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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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인간이 착륙하여 탐색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모험”이었지만 달정복 준비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경이스러운 물건들이 발명되고 새로운 산업들이 신생하였으며 장차 33만명의 사람들이 이 신생산업에서 일을 하게되는 효과도 있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던것은 달정복의 성공은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미국인들의 탐험 정신에 새 활력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때가 Nixon 이 대통령에 취임한지 6개월후 이었다. JFK 와 LBJ 의 수고로 생색은 Nixon 이 낼수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Nixon 의 월남전쟁
달나라 정복의 흥분속에서 일시적으로 단합 되었던 미국민들은 지긋지긋했던 월남전쟁 으로 여전히 그전처럼 분열되어 있었다. Nixon 은 대통령 선거운동중에 월남전을 끝내겠다고 공약 하였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한 해인 1969년 5월에도 그 공약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Nixon 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월남에서 철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사실상 미국의 패배를 자인하는것 같은 조건이 포함된 종전협정은 받아드리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Nixon은 자기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북월남에게 분명하게 인식 시켜주기 위하여 이미 3월에 전쟁이 확전 될수도 있는 모험을 시작했었었다. 미공군은 월공과 북월남군의 진지가 있을것으로 의심되는 Cambodia 의 여러 지역을 엄청난 공군의 하력으로 비밀스럽게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반전시위를 우려하였던 Nixon 은 Cambodia 비밀폭격을 국회에 보고하지도 않았고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었다. 이 폭격들은 철저한 안보를 위해서 공군장관도 모르는채로 집행되었다.


이처럼 극비리에 전쟁을 사실상 확전을 하고 있으면서도 Nixon 은 공개적으로는 미군을 월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Nixon이 1969년 1월에 대통령에 취임하였을 때에는 월남에 미군 50만명이 출전하고 있었다. 그는 6월에 2만5천명의 미군들이 철수하게 될것이라고 발표 하였는데 9월에는 추가로 3만5천명이 다음달에 철수할 것이라고 말하였었다.

그러나 월남전쟁의 책임을 물어 LBJ 를 권좌에서 밀어낸 반전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LBJ 의 전쟁을 반복하고 있는 Nixon 의 월남전쟁을 더 용납할수가 없었다. 10월 11월 두달동안에 Washington 을 비롯해서 미국의 여러 도시들에서 거대한 반전시위들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동조자들이 Hippie, Yippie 와 New Left 학생들만으로 국한되지 않고 징병 반대자들도 참여하였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국회도 국회가 미국의 외교문제를 통제해야 한다는 책임을 충분히 행사하지 않해 왔다는것을 자성하기 시작하였다.

상원은 6월말에 “대통령은 국회 상하양원의 명확한 허락이 없이는 외국에 병력이나 자금을 동원 할수 없다” 라는 “의견결의” (Sense of the Senate Resolution) 을 70대 16으로 통과 시켰다. 표결수로 보아서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도 동참했음을 알수 있는 것이었다.

Nixon은 1969년에 앞으로 미군은 점차적으로 월남에서 철수하고 월남군이 월남전쟁을 감당하도록 하겠다고 발표 했었다. Nixon은 1970년 4월 22일에 앞으로 1년 이내에 미군 15만명을 추가로 철수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이 기대하는 “정의로운 평화”가 올 수있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에 내린 결단 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열흘후에 미국 사람들은 미군이 월남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공산군들의 보급기지와 본부들을 분쇄하기 위해서 Cambodia를 “점령” 하는것은 아니지만 임시 “침공”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 하였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반전주의자들의 항의가 태풍처럼 전국의 대학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Ohio 주의 Kent State University 에서는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교내에 있는 군사 훈련건물 들을 방화하는등 너무 격렬하여져서 주지사가 5월 4일에 주방위군 900명을 진압차 출동 시켰는데 학생들이 돌맹이를 던지는등의 과격한 시위열기에 자극을 받은 같은 나이 또래의 방위군 병사들이 학생들에게 발포하여 남녀학생 두명씩 네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 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즉각적으로 미국 전역의 대학교 80여개들이 강의들을 중단하고 반전항의를 하였었다.
대학교 총장, 교수, 학생들등 수천명이 Washington에 몰려와서 항의시위를 하였었다. 이러한 모든 예상치 않았던 긴박한 사태들은 국회를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상원은 1970년 6월 24일에 81 대 10으로 대통령의 국회의 사전 허가없는 병력출동을 허락했던 “Tonkin 만 의결” 을 폐지시켰다.

이제 미국은 실질적으로 미군을 철수하고 전쟁을 축소해 보려고 하였으나 월남전쟁은 마른 장작에 붙기 시작한 불처럼 자발적으로 확전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71년 2월에 미군 helicopter 들과 폭격기들의 엄호아래 월남군인들이 Laos를 침공하였는데 미국무성은 그 침공이 미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한 작전이었다고 설명하였다.

Nixon의 지지부진한 월남전쟁 종식의 결실에 실망을한 국회는 11월에 군사물자 구매법에 “대통령은 미군 포로들이 석방된후 지정되는 일자내에 미군을 전원 철수하기로 한다” 라는 개정조건을 붙혀서 법을 통과시켰다.

Nixon 은 그 법에 서명 하면서 개정조항은 무시 하겠다고 말하였다.
1972년 3월에 북월남군 수천명이 거침없이 월남을 공격해 왔다. 미국공군은 무서운 화력으로 Indochina 전역을 폭격함으로써 보복하기 시작하였다. 2개월이 지나도 북월남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Nixon 은 북월남에 막중한 압력을 주기 위하여 Hai Phong 항구에 어뢰를 투하 하도록 명령하였다. Hai Phong 항구에는 쏘련의 선박들도 많이 정박 하고 있어서 만일 쏘련의 배가 어뢰에 침격당할 경우에는 전쟁은 예측할수 없는 방향으로 확전될수 있는 위험이 있었었다. 이처럼 전쟁이 종결될수있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Nixon 은 8월말에 1972년 12월경에는 미군 2만7천명만 남아있게 될것이라고 말하였다.

월남에서는 혼돈속에서 격렬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Paris 에서는 미국과 북월남간에 평화협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드디어 1972년 10월 26일에 북월남은 전쟁을 종전하기로 하는 협약이 이루어 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더 협상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던 까닭에 12월 16일에야 Kissinger 는 평화조약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그 이후에 얼른 설명도 되지않고 서로 연결도 되지않는 사태들이 연속해서 일어난다.

그 이틀후 Hanoi 의 북월남정부는 미국 공군기들이 전쟁중 가장 극심한 정도로 폭격을 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Sweden 의 국무총리는 미국이 북월남을 고문하는 방법으로 폭격을 하고 있다고 맹 비난을 하였고 Canada 하원은 만장일치로 미국을 규탄하였다.
미국은 폭격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가 12월 30일에 폭격을 중단하였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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