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쇼 호스트 없어도 오스카는 고

2019-02-06 (수) 하은선 사회부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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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극장에 갔다가 본영화 상영이 지연되는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예고편 상영이 끝나고 3분 가량 블랙아웃이 지속되자 뒤에 앉은 노부부가 하얀 빛을 발사하는 영사실 창문을 돌아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영사기사가 자나봐” “아냐. 컴퓨터가 고장난 거야. 고치고 있겠지” 1분쯤 더 기다렸지만 여전히 영화 상영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할아버지가 일어서서 영사실 안을 들여다 본다. “어, 아무도 없네. 어딜 갔지?” 그제서야 옆 좌석에서 셀폰만 들여다보던 한 청년이 극장 밖으로 항의를 하러갔고 한참 후에야 본 영화 상영이 시작됐다.

요즘 극장 영사실에는 영사 기사가 없다. 영사실이 더 이상 영화가 잘 나가는지 확인하는 감시창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영사기에 필름 감기는 소리도 그 옛날에 사라졌다. 1999년 디지털 시네마가 도입된 이후 필름 영사는 디지털 파일과 디지털 영사기로 교체되었고, 프로그래밍된 영화가 알아서 스크린으로 영사되기에 사람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시네마 천국’에 나오는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는 24일 개최되는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쇼 호스트 없이 진행된다. 오스카를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13명의 A-리스터(셀러브리티)를 차례로 무대에 등장시켜 다양한 부문의 후보자를 소개하고 수상자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시상식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한 명 혹은 두 명의 쇼 호스트가 시작부터 주요 부문 시상자 소개까지 도맡아서 안내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진행이 아니라 ‘새러데이나잇라이브’(SLN)처럼 집단으로 진행하는 방식의 대본이란다. 쇼 호스트를 구할 수 없어 마련한 궁여지책이지만 해가 갈수록 떨어지는 오스카 시청률이 호스트 한 사람의 입담으로 회복될 리 없으니 새로운 시도는 해볼만 하다. 2017년부터 아카데미 후보작도 영상을 편집해서 라이브 채널을 통해 발표하기 시작하지 않았나. 발표 당일 새벽 4시30분부터 영화관계자들이 가슴을 졸이며 아카데미 후보작 발표장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오전 5시20분 컴퓨터를 켜고 라이브 채널로 시청하면 된다. 이미 3년 째 계속되고 있는 ‘사람’이 필요없는 행사다. 후보작이 발표될 때마다 울리는 사람들의 환호성 대신 메신저와 문자들이 봇물을 이루고 소셜미디어에 축하 글과 함께 팡파레 이모티콘들이 폭죽을 쏘아 올린다. 조만간 아카데미 시상식도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 입고 수상 축하를 위해 돌비 극장에 앉아 주구장창 기다리기 보다는 각자의 집에서 자축하며 화상통화로 수상 소감을 건네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점점 사람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사람이 자초한 일이니 그냥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편리한 세상에 살고 싶어 인간이 만들어낸 디지털 시대 아닌가.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소셜 미디어 세상을 살다 보니 그 누구도 독박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떡이나 먹고 싶은 마음이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은선 사회부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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