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울뉴런’을 깨워주는 정치

2019-01-30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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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자코모 리촐라티 팀이 발견한 ‘거울뉴런’(mirror neurons), 즉 거울신경세포는 학계에 쓰나미 같은 충격파를 던졌다. 연구팀은 인간을 비롯한 몇몇 동물들이 거울뉴런 덕에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마치 자신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규정돼 왔다. 거울뉴런은 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가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발견이었다. 감정과 느낌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 아는 것, 이것을 우리는 ‘공감’이라 부른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거울뉴런에 ‘공감뉴런’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였다. 공감은 우리의 본성이고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 만들어 준다.

우리 뇌에는 거울뉴런이 존재하지만 이것의 민감성은 사회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전 세계인들의 가치관을 조사하는 ‘월드 밸류 서베이’에 따르면 공감은 젊은이들 사이에 좀 더 보편화돼 있으며, 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렇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일부 젊은이들이 춤을 추며 폭식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을 ‘한국사회 일부 못난이들’의 예외적인 일탈로 치부하고 싶은 건 이런 조사결과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공감능력 상실이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세월호는 이것을 극명하게 확인시켜 준 국가재난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났던 건 한국사회의 ‘안전 불감증’만이 아니었다. 집권세력의 ‘공감능력 결여’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유가족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은 채 망언을 서슴지 않은 정치인들, 그리고 유가족들의 외침을 철저하게 외면한 당시 권력자는 공감과 너무 거리가 멀어 보였다.

국민들을 위해 일한다는 정치인들에게는 누구보다도 깊고 민감한 공감능력이 요구된다. 지난 2008년 미국 대선 여론조사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질문 항목이 하나 추가됐다. 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선택항목을 제치고 “공감”을 꼽은 응답자들이 가장 많았다. 공감을 선택항목에 넣은 질문도 처음이었고 이런 응답이 나온 것도 물론 처음이었다.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들의 처지와 아픔을 잘 다독거려 주는 게 공감의 정치다. 그러나 한층 더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구성원들의 공감능력이다. 많은 사회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은 개인들의 삶이 안정될수록 공감능력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등과 복지가 보편화된 국가일수록 국민들의 공감능력이 높은 것이다.

거울뉴런의 발견은 공감능력이 본능적인 것임을 깨우쳐 준다. 그럼에도 사회가 갈수록 살풍경해지고 있는 것은 경쟁이 미덕이라는 가치관이 지배하게 되면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낙오할지 모른다는 상시적인 불안이 공감능력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공감의 시대’가 왔다고들 한다. 공감의 시대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줄 아는 단계, 즉 ‘역지감지(易地感之)’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바람과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인다.

신년을 맞아 본국판 한국일보는 ‘파편사회서 공감사회로’라는 주제의 특집을 내보내고 있다. 한국사회를 찢어놓고 있는 혐오와 배제를 덜고 공감과 동행을 더하자는 취지의 시리즈다. 특집은 수많은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좋은 정치가 실종된 상태에서 이런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좋은 정치란 진심어린 스킨십으로 구성원들의 불안을 완화시켜주고, 살만한 세상이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정치를 이른다.

하지만 단순한 스킨십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지와 사회안전망의 확대라는 구체적 정책을 통해 국민들이 일상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럴 때 공감능력은 자연스럽게 발현되고 확대된다. 이것이 거울뉴런을 깨워주는 정치다. 그러니 공감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거울뉴런을 억압하고 두려움을 확산시키는 데만 골몰하는 선동과 기만의 정치를 거부하는 국민들의 현명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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