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 탓하기 전 방부터 정리하라”

2018-12-19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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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여성들이 1년에 구입하는 옷가지는 얼마나 될까. 한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거의 60벌에 달한다고 한다.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가 하나의 뿌리 깊은 문화가 되어버린 한국의 통계이니 보편적이라 보긴 힘들어도 미국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매일 패션쇼를 하는 게 아니라면 이 많은 옷들이 어디에 걸리게 될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옷장을 한 번 열어보자. 언제 마지막으로 입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옷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 가운데 20%로 일상생활의 80%를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절반 이상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란 말이 된다. 그런데도 이런 옷들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옷장 속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비단 옷뿐이 아니다. 손때가 조금 묻었다 싶으면 차마 버리지 못한 채 쌓아두는 잡동사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언제 쓰임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다. 한 번 구입한 물건은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물건들 가운데는 자신의 체취와 기억이 배어있는 것들이 많다. 버리자니 자신의 일부를 지워내는 것 같아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먹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막상 치우려 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이런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조언과 도움을 주는 ‘정리 컨설턴트’라는 새로운 직업까지 생겨났다. 정리 컨설턴트들이 호황이라니 그만큼 정리하고 버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버리지 못하는 것도 너무 심하면 ‘저장 강박장애’라는 병으로 분류된다.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물건을 버릴 때조차 뇌의 전두엽 부위가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건 정리에 어려움을 겪거나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은 심리상태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대개 작은 일을 크게 확대해 생각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새로운 것을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원리다. 요즘은 조직이론에서조차 비움의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다. 조직이 새로운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새 것을 배우는 학습만이 아니라, 낡은 것을 버리는 ‘폐기학습’(unlearning)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새로운 한해를 앞두고 있는 연말은 새것을 담기 위해 정리하고 비우기에 가장 좋은 절기이다. 너부러진 방안을 잘 정리하고 옷장 속을 점령한 쓸모없는 물건들만 치워도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확 트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까지 가지런해 진다는 게 정리 컨설턴트들의 귀띔이다.

삶의 혼돈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에 관해 활발히 저술과 강연을 해오고 있는 조던 피터슨 토론토 대학 교수 또한 그런 지혜 가운데 하나로 “세상을 탓하기 전에 당신의 방부터 정리하라”고 조언한다. “물건의 정리가 곧 삶의 정리”라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쌓아둔 물건만큼이나 무거운 감정의 짐을 지고 간다는 말이 된다.

물론 정리해야 할 게 잡동사니 뿐만은 아니다. 올 한해 마음에 쌓인 감정적 찌꺼기들도 잘 정리하고 버려야 한다. 틀어진 인간관계가 있다면 올해가 가기 전 바로잡는 게 좋다. 먼저 전화라도 걸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본다면 웬만한 오해와 앙금은 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감사를 전하도록 하자.

비우고 버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구매습관과 인간관계 등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잘 버리는 것을 좋은 삶을 위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생활공간으로서의 방 뿐 아니라 마음의 방까지 잘 정리정돈하고 가는 세밑이 돼야 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좀 더 가뿐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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