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 부시’ 가 남긴 유산… WASP의 가치

2018-12-10 (월)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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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W. 부시의 타계는 그가 속해 있던 미국의 구제도에 대한 적지 않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와 함께 구제도는 주로 혈연과 연줄에 의해 멤버십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비평가들 사이에 열띤 토론을 촉발시켰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지닌 자리에 오르려면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라는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아무래도 이처럼 차별적인 제도를 후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도 후하게 평가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구제도는 종종 끔찍한 편견으로 얼룩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인종분리주의가 기승을 부렸으며, 거의 언제나 배타적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명백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WASP 귀족들은 절도와 겸손, 그리고 현대 엘리트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투철한 공공정신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몰락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1차 걸프전 승전 이후 이라크를 점령하지 않기로 한 결정, 예산적자를 줄이기 위해 선거공약을 어긴 채 증세를 받아들인 결단에 이르기까지 부시의 가장 위대한 순간들은 여론에 영합하려는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자제력과 올바른 선택능력으로 점철됐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제력이라든지 올바른 선택능력 등의 미덕은 올드 엘리트들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힘과 든든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과거의 귀족층은 국가의 운명을 광범위하게 바라볼 여력이 있었고, 자체적인 이익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눈앞의 사리사욕을 뛰어넘어 장기적인 안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지위가 우발적이고, 임의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았기에 구성원 각자가 겸손과 절제, 기사도 정신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행위규범을 고수했다.

지금 내가 단 한 번도 실존하지 않았던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 주장을 입증할 생생한 예를 제공하려한다.

타이태닉호의 첫 항해 당시, 이 여객선의 1등 선실들은 포브스지 400대 부호 명단에 이름이 오른 부유한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기 시작하면서 구명정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윈 웨이드의 회고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에게 구명정을 양보했다. 그 결과 1등 선실에 타고 있던 여성과 어린이들의 95%가량이 구조됐다. 반면 구명정에 승선해 목숨을 건진 1등선 남성의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1등선 승객들이 구명정에 접근하기가 훨씬 수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남성들 대부분은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사이의 불문율인 행동규범을 준수했다.

오늘날 엘리트는 주로 교육을 통해 훨씬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선출된다. 높은 시험성적을 올린 사람들이 좋은 대학과 훌륭한 대학원에 진학하며 가장 근사한 일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성취라는 트레드밀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스스로의 생존법과 성공을 구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시야는 점차 좁아지고, 그들의 지평은 점점 단기적이 되며, 그들의 행동은 사익추구로 모아진다.

한심하게도 엘리트들은 그들의 신분이 합법적인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그들의 특권이 출생에 의해 우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구 WASP 제도 소속원들의 의식을 결여하고 있다.

오늘날의 CEO들과 다른 엘리트들은 스스로에게 엄청난 임금을 지불하고, 개인의 이득을 다투며, 지배력을 행사할 수 위치로 올라가는데 몰두한다. “능력주의”는 칭찬의 뜻을 담아 만든 용어가 아닐 것이다.

영국의 사상가인 마이클 영은 시험을 통해 선발되고, 현대의 불평등을 재능과 노력의 공정한 결과라 확신하는, 우쭐대고, 오만하며 야심만만한 새로운 엘리트 관료층이 득세한 반이상향적인 사회를 그렸다.

후일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칭찬의 뜻으로 사용한 토니 블레어에 관해 기술하면서 영은 블레어 총리가 제도에 의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현재 당신들의 낮은 신분은 온당한 것이며 당신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는 대단히 비도적인 태도를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여러 유세에서 오늘날의 엘리트와 그들의 오만을 공격하는 후렴구를 흔하게 사용했다. 그는 그들의 학력에 초점을 맞춘 후 군중을 향해 “그들은 엘리트가 아니다. 바로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엘리트다”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하는지에 민감한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진정한 혐오의 통로를 발견했다.

프랑스에서 발생한 폭력 시위는 메트로폴리탄에 거주하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을 무시하고 있다고 믿는 지방 빈민들로부터 추진력을 얻었다. 2016년 브렉시트 투표는 기술 관료들에 반대하는 동일한 저항을 반영한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다른 사람은 다 아닐지라도 나는 WASP 제도의 부활을 원치 않는다. 단지 내가 묻고 싶은 것은 WASP 제도의 덕목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점이 없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엘리트는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제대로 인지하고, 최소한 부유하거나 빈한하거나,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교육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모든 인간은 동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는 간단하고 전통적이며 보편적인 아이디어에 따라 살아야 한다.

<파리드 자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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