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신의 ‘조문 덕목’ 은?

2018-12-05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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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조지 H.W. 부시 서거에 정파와 계층을 가리지 않는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장례식이 치러지는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했다. 각계로부터 쏟아지고 있는 애도 메시지의 키워드는 두 개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말과 행동으로 보여줬던 ‘애국심’과 ‘품위’가 그것이다.

부시를 추모하는 많은 방송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조지 H.W. 부시, 대통령 그리고 애국자’이다. 부시는 2차 대전이 터지자 18살 나이에 해군조종사로 자원입대한다. 부유한 투자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군 복무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일본 오키나와 상공서 격추됐다가 극적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부시는 이런 애국심을 통해 보수의 가치를 체현했던 정치인이다. 대통령으로서 부시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미국인은 없다. 부시가 더욱 빛나 보이는 건 입으로만 애국하는 사이비 보수들이 득실대는 세태 때문이다. 이런 사이비 보수들이 부시의 서거를 계기로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하는 것은 그만큼 진정한 보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부시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보수의 보편적 가치가 ‘애국심’이었다고 한다면, ‘품위’는 부시라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준 개별적 가치라 할 수 있다. 그의 품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되는 것은 재선에 실패한 후 백악관을 나오면서 클린턴 앞으로 남겨둔 손편지다. 이 편지에 부시는 진심으로 클린턴의 성공을 빌면서 전임자로서, 그리고 인생 선배로서의 진솔한 조언들을 담았다.

승자로서 관용과 아량을 보이기는 쉽다. 하지만 패자로서 품위를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직이었던 자신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젊은 후임에게 이렇듯 따스한 편지를 남길 수 있는 품성을 지닌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부시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서로 경쟁을 했다는 사실이 적이 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정치가 그렇게 비열하고 추악해져서는 안 된다.” 그는 이런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부시와 클린턴은 이념과 나이를 뛰어 넘어 평생의 우정을 맺었다. “클린턴이 아들 부시보다 더 아들 같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내면적 성장의 중요성을 탐구한 책인 ‘인간의 품격’을 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는 인간의 덕목을 ‘이력서 덕목’(resume virtues)과 ‘조문(弔文) 덕목’(eulogy virtues)으로 나눠 생각해 보라고 권고한다. ‘이력서 덕목’은 말 그대도 일자리를 구하고 외적인 성공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기술들이다. 반면 ‘조문 덕목’은 장례식장에 찾아온 조문객들이 생전의 고인을 회상하며 언급하는 덕목들이다.

‘조문 덕목’이야말로 한 존재의 중심을 이루고 그 사람의 삶을 축약해주는 핵심적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단 한마디로 기억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력서에는 무수한 사실과 경력이 기재되지만 묘비명은 단 한 줄이면 충분하다. 대통령을 몇 번 했는지, CEO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할 뿐이다.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이력을 밟아온 부시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시시콜콜한 경력이 아닌 그의 ‘애국심’과 ‘품위’다. 이것이 바로 조지 H.W. 부시가 미국인들에게 남긴 ‘조문 덕목’이다. 부시의 삶과 죽음은 품위와 품격을 상실한 보수 전반, 그리고 갈수록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정치권에 큰 교훈과 울림을 전해준다. 또 보통사람들에게도 “나의 조문 덕목은 무엇이 될까” 자문해 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력서 덕목’과 ‘조문 덕목’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뤘던 부시의 일생이야말로 ‘정말 잘 살았던 삶’(a life well-lived)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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