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등대지기’

2018-12-04 (화) 진이정(1959-1993)
작게 크게
‘등대지기’

김소문 ‘모성’

외로운 이는
얼굴이 선하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그의 일과 중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일어나자마자 깃발을 단 뒤
한 바퀴 섬을 둘러보는 일,
잰 걸음으로 얼추 한 식경이면
그 섬을 일주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곳에서
산보나 하며 살고 싶었다
한 식경이 너무 과하다면
몇 걸음 디디지 않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어린 왕자의 알사탕 별일지라도

진이정(1959-1993) ‘등대지기’ 부분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 시를 생각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이 시를 생각한다. 나는 선한가? 그렇다고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선한 얼굴에 가만, 영혼을 묻고 그리만 살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 얼굴 같이 착한 섬을 한 바퀴 산보나 하듯 둘러보며 살고 싶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상의 섬. 상상의 얼굴. 잃어버린 꿈에서 깨어나 우리는 아침마다 일상의 깃발을 세운다. 의자를 돌려 석양을 맞을, 낮고 외롭고 큰 등대지기는 어디쯤에? 이대로 남은 꿈이나 꾸자. 풍요한 외로움과 아무도 해하지 않는 선함을, 산보와도 같이 착한 노동을, 낮고 겸허한, 잡을 수 없어 더 빛나는 그 착한 꿈을. 임혜신<시인>

<진이정(1959-1993)>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