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쟁 (계속)
그 다음날인 8월 5일에 LBJ 는 마치 이와같은 사태의 발발을 기다리기나 하고 있었다는듯이 국회에 “미군총사령관으로써 대통령이 미군에 대한 공격을 응징하고 또 차후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것을 허락한다” 라는 상하원의 의결을 해줄것을 요청했다. 하원은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요청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상원에서는 Oregon 주 무소속의 Wayne Morse 상원의원이 국회에 속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주장과 함께 만약 상원이 토론없이 의결하려고 하면 무한정 연속발언인 filibuster 를 시작하여 표결을 저지하겠다는 위협을 하였고 Alaska 상원의원이 “대통령에게 사전에 싸인한 공수표를 줄 수 없다” 라는 반론이 있었으나 상원도 이 두의원 을 제외하고는 전원일치로 LBJ 의 요청인 “Tonkin 만 결의” 라는 것을 통과시텼다.
LBJ 는 이미 한국전쟁때에 Truman 이, Lebanon 에서 Eisenhower 가, Cuba 에서 Kennedy 가 국회의 사전 동의없이 병력을 출동시킨 선례에 따라 이번에도 꼭 국회의 사전허락이 필요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차후의 국회의 비난을 예방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필요할때에 병력을 출동시킬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미국사람들도 지구의 다른편에 있는 나라의 내전에 미군을 출동할 수도 있다는것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없었던 듯하다.
1965년 1월에 LBJ 의 자문관들은 월남을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월남에 지원을 증대하여야 할것이라고 조언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던차에 2월에 월공이 미군부대를 공격하여 미군 7명이 전사하고 백명이 부상당한 일이 있었었다. LBJ 는 그 보복으로 즉각 북월남을 폭격하도록 명령 하였었지만 전면적인 폭격이나 병력을 증강 시키지는 않았었다. 그는 “미국민들은 미국이 또 다시 Asia 의 열전에 참전하는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었지만 미국은 사실상 서서히 열전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월남을 포기할수는 없었다. 미국이 “패배” 하지않기 위해서 미국은 무력사용을 증대할 수밖에 없었다.
3월부터는 미국 공군기가 정기적으로 폭격을 시작하였으며 4월 1일에 LBJ 는 자신의 약속을 져버리고 월공에 대항하여 미군을 투입하였다. 며칠후에 그는 사전 발표도 없이 미군 2만명을 이미 투입된 2만7천명위에 추가로 투입하였다. LBJ 는 1965년 7월경에 월남전을 본격적으로 확전하여 조속히 승리하기로 결정했고 년말쯤에는 총 18만5천명의 미군이 투입되어 있었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미국은 국가체면을 위해서도 쉽게 빠져 나올수 없는 수렁텅이에 점점 깊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월남전으로 미국이 혼돈스러웠던 때인 1965년 4월 25일에 Caribbean 해협에 있는 Dominica 공화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내전이 뒤따른 가운데 공산세력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잘못된 판단끝에 미국대사가 미군의 개입을 요청해 왔었다. 이미 Cuba 의 공산화로 기겁을 했던 LBJ 는 월남전이 확전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 2만2천명을 파병하여 5월중에 사태를 수습하였는데 사실은 공산세력의 개입은 없었던 일이었다.
월남전에 대한 오판으로 점점 곤경에 빠져들기 시작한 LBJ 는 월남전에 대한 진상을 국민들에게 “숨기기” 시작했다. 그의 공약이 지켜지지 않는것을 알기 시작한 미국민들 에게 LBJ 는 차츰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7월에 확전을 하기로 결정한 LBJ 는 5만여명의 미군을 파병하면서 증가된 전비를 국회에 요청하면서도 장기적인 참전계획 이나 추가로 필요한 총전쟁비용등에 대해서는 국회에 보고하지 않았었다.
전쟁때에는 승전을 하고 평화시에는 국민의 복지를 위했던 정치에 성공했던 FDR 보다 더 훌륭한 대통령이 되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노라고 자인하였던 LBJ 는 후일 1965년 7월 확전계획 당시 국회에 정확한 보고를 하였다면 자신의 Great Society 정책들에 대한 예산을 국회가 많이 삭감해 버렸을 것이라고 술회 하였었다고 한다. 대통령으로써는 다 털어내어 놓을수 없는 입장이 있었겠지만 국민들도 그의 말과 행동이 다름을 감지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정치 문제에서도 혹시 그의 졍책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오면 그 정책을 바꿔버리는 일들도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월남전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을 믿지 않기 시작하던 국민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LBJ 발언 전부를 믿지않기 시작하였다.
1965년중에 월남전을 반대하는 징후가 전국적으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원 외교위원장으로써 상원의 중진이었던 Arkansas 주의 J. William Fulbright 상원의원은 Tonkin 만 결의에 찬성표를 던졌던 인물이었으나 이제는 미국이 너무 월남전에 깊이 개입 했다고 말하면서 미국이 월남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University of Michigan 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동참하는 “Anti-War Teach-In” 이라는 형식의 반전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연구발표와 항의시위가 겹쳐진 반전시위이었다. 10월에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서 공개적으로 징병카드 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으며 1965년도에 있었던 가장 컸던 반전항의시위는 11월에 3만명이 Washington 에 몰려와서 반전시위를 하였던 것이었다.
LBJ 가 1965년 7월에 확전을 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은 측근 참모들이나 관계각료들과 심중히 상의한후 내린것 같지 않아보이는 징조들이 있다. 바로 그 7월쯤에 McNamara 국방장관은 LBJ 에게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을 유도해 내기위해서 폭격을 중지해 보도록 건의해 왔다고 한다. 반전열기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것을 감지한 Rusk 국무장관도 국방장관의 건의에 동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LBJ 는 1965년 12월 23일에 폭격을 중지하고 평화공세를 다방면 외교로 추진해 보았으나 북월남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드디어 LBJ 는37일만인 1966년1월말에 거대한 B52 폭격기들이 북월남을 다시 폭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미국민들의 반전여론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월남전 참전은 더욱 깊어져 가고 있었다. 1966년도 말에는 미군 40만명이 참전하고 있었다. 1965년도에 2천5백명이었던 미군의 사상자는 1966년에 이르러서는 3만3천명에 달하였으나 전쟁은 차츰 더 어려워지고 끝이 보이지도 않는것 같았었다. 전쟁반대의 열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New Left 라고 자처하는 소수의 극렬학생들은 공중집회들을 방해하고 전쟁찬반 토론조차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들의 행동은 국민들의 지탄도 받았지만 1966년말경에는 대통령이 자유롭게 공식석상에 나오기가 불편한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비록 월남전에서 “승리”를 할수가 없더라도 미국이 월남에서 손을 털고 떠나와 버릴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었다고 한다
1966년말이 되어오면서 McNamara 국방장관은 전쟁의 결론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끊임없는 공중폭격이 적에게 아무 효과가 없는것이 분명해지고 있었음으로 폭격을 중단하고 평화교섭을 더 열심히 추진해 보자고 건의하였다. 그는 필요 하다면 월공도 협상에 참여시켜서 그들도 종전후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보자고 건의 했었다고 한다.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1965년 11월에는 미국민 66%가 LBJ 의 국정을 지지 하였었으나 1966년 10월에는 지지도가 44% 로 줄어 들었었다. 그 결과로 다음달인 1966년 11월에 있었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상하양원에서 모두 의석을 잃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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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