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34)제36대 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 ⑧

2018-11-26 (월)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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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잡다한 난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했던 LBJ 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어 점점 확전이 되어가고 있는 월남전을 승전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1965년도의 감세로 국민들의 주머니가 조금 두툼해 지면서 전반적으로 수요가 늘어났었는데 월남전은 점점 확전되기 시작하여 막대한 군수물자가 필요했었고 엄청난 액수의 전비가 쓰여져서 “평화”시대에 “전쟁” inflation이 시작되었다.

Kennedy 재임시에 소비자 물가지수의 인상은 매년 1% 정도이었었는데 LBJ 의 재임시인 1967년에는 3% 로 올라갔다가 1968년에는 5% 가 되었었다. 정부의 임금과 물가통제로는 inflation 을 막아 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었다.

Inflation 을 억제하고 대폭 증가되는 월남전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LBJ 는 1967년에 국회에 단기적으로 소득세 10% 부가세 제도를 요청하였었다. 이 부가세는 납세자가 일단 정상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계산한 후 그 세금의 10% 를 부가세로 더 납세하도록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쯤에는 국회는 LBJ 의 요청이면 다 들어주던 국회가 아니었다.


국회는 부가세를 통과시키지 않은채로 국방비가 증가되는 액수만틈 LBJ 의 Great Society program 들을 삭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정부의 적자는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 38억불이던 예산적자가 1967년에는 87억불이 되었다가 1968년에는 252억불로 늘어났다. 드디어 1968년 6월에 국회가 10% 부가세를 입법하였을 때에는 inflation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에 1964년 경부터 1968년경까지 점점 격렬해지기 시작했던 흑인폭동들과 Hippie 등 젊은 백인 청년들의 방황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사실 미국역사상
Kennedy 와 Johnson 만큼 흑인들의 민권과 복지에 대해서 노력을 많이 하고 입법도 많이 했던 대통령들은 없었지만 Johnson 때만큼 흑인들의 폭동이 대규모로 여러 도시들에서 자주 일어났던 적도 없었었다.

물잔에 물이 말라 있는 것을 보고 LBJ 는 물을 서서히 채워가고 있었으나 흑인들의 눈에는 물이 채워지는 속도도 느리고 다 채워 지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불만이 있었었다. 여기에 Hippie 들의 방황까지 겹치고 각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반월남 전쟁시위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1967년과 1968년경에는 미국의 사회질서가 아주 문란해 보이고 “안보”가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였었다. 만일 LBJ 가 독재적인 성향이 있었던 정치인이 었었다면 “안보”를 빌미로 강압적인 정치를 할 수도 있었었다고 생각된다.

월남전쟁

독일, 이태리, 일본등 독재국가연합을 패망시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들을 승전으로 영도하여 Roosevelt 대통령이 전쟁영웅이 되었고, 한국전쟁에서 최소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 부터 방호하는데 성공한 Truman 대통령이 전쟁영웅이 되었던 반면에 미국의 New Mexico 주 크기의 미개한 작은 나라인 월남과의 전쟁에서 미국은 막강한 무력을 사용하고도 ”패배” 하고 도망치듯 물러 나오게 되었었는데 그 과정에서 Johnson 대통령은 혼신의 노력을 다 하고도 그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정치를 영원히 떠났어야 했었다. 전쟁중에 오판을 연속해온 LBJ 는 자신의 퇴진이 전쟁의 종식에 도움이 될 것임을 깨닫고는 서슴없이 정계를 떠났다.

LBJ 는 이념의 차이를 가진 월남국민들의 염원을 고려하지 않았었고 월남전쟁은 막강한 미국의 무력을 투입하면 단시간에 끝날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LBJ 의 오판에는 백인들의 고질적인 “유색인종 깔보기” 라는 편견이 작동한것이 아니었던가 라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미국역사가들 간에는 미국이 월남전에 참전하게된 동기, 참전과 확전을 하게된 정확한 과정, 월남전이 승전이었는지 아니면 패전이었는지에 대한 평가와 월남전이 미국에 남긴 영향 등에 대해서 지금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면 전쟁이 막상 시작되고 계속되고 있던 시기에는 얼마나 미국의 정치가들과 국민들이 혼동하고 있었을까 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월남전쟁에 미국이 개입 할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세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로 Eisenhower 대통령의 Domino Theory 에 의하면 만일 미국이 동남 Asia 의 어느 나라가 공산화가 되는 것을 방관하고 있을 때에는 마치 첫 Domino 짝이 넘어지면 그뒤에 세워져 있는 나머지 짝들도 연속해서 넘어지는 것처럼 동남 Asia 전역이 공산화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Eisenhower 는 초기에 월남에 물자지원만 해주었고 조심스럽게 군사개입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막상 소규모로라도 군사개입을 시작했던것은 Kennedy 대통령이었다.

둘째로는 Hitler 가 WW II 초기에 거의 전유럽을 점령할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과 불란서가 주저하며 전쟁에 조기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으로 미국은 아직 월북군들이 대거로 참전하지 않아서 월남이 곪기전에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수술의의 의술이 조금 모자라지 않았던지 모르겠다.

세 번째 이유는 미국의 국제적 신망과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 월남전참전이 불가피 했다는 것이다. WW II 이후 미국은 세계평화와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며 “방위조약”을 맺었었다. 비록 미국이 월남과 방위조약을 맺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월남의 공산화를 미국이 방관한다면 막상 미국과 방위조약을 맺은 국가들이 미국의 조약 이행을 신뢰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이 차츰 월남전에 발목을 집어 넣기 시작했을 무렵인 1964년의 대통령선거때 강경파 보수주의자이었던 공화당의 대통령후보자 Barry Goldwater 상원의원은 Johnson 대통령에게 미국의 참전병력을 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었다. LBJ 는 확전을 거부하였고 “Asian Boys 들이 처리해야할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American Boys 를 1만여 마일 이나 떨어진 곳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선거공약까지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LBJ 는 “테러를 정당화 시켜줄 수도 있는 회담은 하지 않겠다” 라고 주장하면서 북월남과는 협상을 하지 않았었다. LBJ 의 각료들도 그의 비협상정책에 동의하였으며 미국내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LBJ 의 주장에 크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었다.

미국민 여론의 향배가 불분명했던 1964년 8월 2, 4일에 북월남의 동킹만 (Tonkin Gulf) 에서 미해군 전투함 두 척이 북월남 해군 함정들로 부터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날밤 LBJ 는 TV 방송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의 함정들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은 반복적인 공격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읍니다. 지금 이 순간에 미공군 폭격기들이 북월남의 목표지역들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라고 발표하였다. 후일 알려진 일이지만 피격당시 미해군의 전투함들은 북월남을 공격하고 있던 월남해군의 함정들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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