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치미’

2018-11-22 (목) 12:00:00 박소원 (1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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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

종한 ‘무제’

연탄불이 꺼진 성북동 월세방, 어디에도 연락이 닿지 않고 유리문을 두드리는 동지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학력도 없는 형은 친구에게 빌려온 세계문고판 쿠오바디스를 겉장부터 찢어가며 ‘무소식이 희소식이여’태평하게 딱지를 접는다 녹슨 주인집 철대문을 돌맹이로 괴어 놓고 골목 끝까지 갔다 몇 번씩 돌아오는 사이 차박차박 달빛이 차오른다 아우는 삼 일째 가출중이다 그늘진 곳에서 뚜껑이 닫힌 항아리 속, 삭힌 고추맛과 청강과 생강물이 배어드는 장물 아직도 장맛이 너무 싱거워 장맛은 염도가 좌우한다면 내 생의 중심부에 한 주먹 소금을 풀어준다 두터운 몸속으로 차갑게 배어드는 간기 자연 숙성이 될 때까지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성북동 언덕배기 그 집

박소원 (1963- ) ‘동치미’ 전문

오랜 된 기억의 저 깊고 깊은 곳에 겨울이 오고 있다. 그 추웠던 날, 연탄불 꺼진 월세방에서 가출한 아우를 기다리는 누이는 가슴이라는 장독에 얼마나 많은 소금을 풀어야 했던 걸까. 세계문고로 딱지를 접는 형은 정말 무소식이 희소식임을 믿고 있었을까. 걱정과 근심이 엄동설한 동치미처럼 시리게 익어갈 때, 그들은 그저 산다는 것은 이렇게 아픈 숙성이란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랑하여 아픈 따스한 이들. 돌아가 달빛 차갑게 물결치는 골목을 수 없이 오고가던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겨울이 깊고 있다. 이 세상 불 없는 구석을 향해 신이여, 한 번 더 자비를! 임혜신<시인>

<박소원 (1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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