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년을 산 철학자에게 건망증을 듣다

2018-11-14 (수) 류정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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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이 심한 분들을 위한 연말 선물 아이템이 있다. ‘타일 메이트’라는 열쇠고리 크기의 하이테크 기기인데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에 부착해 두면 스마트 폰 앱에 그 위치가 표시된다.

자동차부터 지갑까지 달아두면 잃어버릴 일이 없다고 한다. 스마트 폰을 둔 곳을 까먹어도 이 기기를 누르면 알람이 울려 찾을 수 있다고 광고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한 기기를 또 찾기 위해 별도의 기술을 이용하다니.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인 단기기억상실증 환자가 온 몸 이곳저곳에 문신을 새긴 것이 연상된다.


기억해야 할 것들의 홍수 속에 살다 보니 언젠가는 영화에서처럼 왼팔에 새긴 문신을 믿지 말라고 오른팔에 적어야 할 때가 올 것 같다.

경제와 관련해서 건망증은 대부분 손해로 직결된다. 페이먼트가 늦으면 연체료까지 부담해야 하고, 채권에 관한 권리주장도 정해진 기간 내에 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실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망증의 위세는 대단해 보인다. 최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크레딧 카드빚을 연체한 이유를 조사한 결과에서 가장 많은 35%는 단순히 “깜빡 잊어서”라고 응답했다.

좀 더 해석이 필요할 것 같은 “갚을 돈이 없어서”나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겨서” 등의 이유들이 뒤로 밀려났을 정도니 건망증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이 건망증을 조금 더 파보면 ‘깜빡 잊어서’라는 변명의 이면에는 문제가 될 때까지 피일차일 미룬 게으름 또는 느긋함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과거에 매트리스를 사며 100일 교환 개런티를 받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바뀌어 교환을 하려던 걸 미루다가 정확히 104일째 되던 날 전화를 했던 경험이 있다.

“누구 마음대로 100일이냐. 너희 매장의 가장 비싼 제품인데 제대로 한번 ‘갑질’(Gapjil)을 해주리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교환 규정만 한참 동안 듣고 맥없이 물러났던 기억이 있다.


연방식품의약청(FDA)의 식품 관련 시설에 관한 짝수 연도 등록 갱신도 마찬가지다. 2년마다 갱신하는 걸 까먹으면 어느 날 난데없이 내 소유의 시설인데 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제조·가공·보관 금지는 물론, 수입 지연과 거절, 행정 조치 및 기타 법적인 책임까지 지게 된다.

저서 ‘백년을 살아보니’를 쓴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는 인간관계에서 건망증에 대해 “여러 사람을 기억하면서 선처하는 사람들이 성공도 하고 폭넓은 지원도 얻는다”라고 적었다.

얄팍하게 당장 카드 밸런스 미니멈 페이를 까먹은 것에 호들갑 떨 것이 아닌 듯하다. 무려 한 세기를 산 철학자의 혜안이 이러할 정도라면 건망증은 보다 진지하게 다뤄져야 할 것 같다.

어느덧 2018년도 세밑을 향하는 요즘 가깝게는 까먹고 지나보내는 것은 없는지 떠올려 보고, 멀게는 나도 백년 인생을 그려보며 한번이라도 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려 한다.

<류정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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