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총기 소유권의 뿌리

2018-11-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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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2세는 영국 왕으로는 유일하게 신하들의 반란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도끼로 목이 잘려 죽은 찰스 1세의 두번째 아들이다. 대다수가 개신교였던 영국국민들은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오랜 내전과 크롬웰의 독재, 왕정복고 등 혼란스런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문제로 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그의 나이가 50이 넘었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딸들은 개신교였기 때문에 몇년만 참고 견디면 개신교가 다시 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 1688년 발생한다. 제임스 2세가 55세에 아들을 낳은 것이다. 이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네덜란드로 시집간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에게 네덜란드 군을 이끌고 영국을 침공하면 자신들이 호응하겠다고 약속한다. 메리의 남편 윌리엄은 그해 11월 5일 네덜란드 군과 함께 영국에 상륙하며 제임스 2세의 신하들은 이에 가세해 반란을 일으킨다.


제임스 2세는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다 네덜란드 군에게 붙잡히지만 윌리엄은 그를 풀어주고 프랑스에 망명해 살도록 한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제임스 2세를 몰아낸 개신교 지도자들은 다시는 왕들이 권력을 남용해 개신교를 탄압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받아낸다. ‘권리장전’으로 불리는 이 문서에는 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조항 등 왕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총기 소유권이다.

‘권리장전’은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이 무장한 상태에서 개신교들의 무기를 박탈하려 했다며 “개신교들은 방어를 위해 법이 허용하는 적절한 상황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권리장전’의 이 조항은 훗날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국민들에게 무기가 없을 경우 군대를 앞세운 왕권의 횡포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1775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식민지 민병대와 영국군 사이에 첫 전투가 벌어진 것도 영국군이 민병대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압류하려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사회는 인디언의 공격과 흑인 노예들의 반란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때 ‘모든 국민은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는 주장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연방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이어 중요한 권리로 인정한 수정헌법 2조의 총기 소유권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그 후 2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조항은 미국인을 집단으로 저승으로 보내는 저승사자 노릇을 하고 있다. 유대인 증오자가 회당에 총기를 난사해 11명을 죽인 지 2주도 안 돼 이번에는 남가주 사우전옥스의 한 바에서 한 정신이상자가 무차별 총격을 가해 13명이 죽고 20여명이 다쳤다. 총을 쏜 이안 롱은 해병대 전역자로 정신질환을 앓아 왔으며 현장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헌법이 보장한 권리라지만 호신용 권총이나 사냥용 엽총이 아니라 갱단이 집단 살상용으로 사용하는 반자동 소총까지 판매를 허용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도 이를 규제하려는 노력은 미 총기협회(NRA)와 이들 지지를 받는 정치인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있다. 아무리 되풀이 되어도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 총기 학살극은 미국의 뼈아픈 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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