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짱도 옳게 부려야…

2018-11-07 (수)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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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남가주의 한 개척교회에서 여신도가 출산하자 목사님 입이 쩍 벌어졌다. 모처럼 신도 한명이 늘어서다. 장래 집사님 아기였다. 여신도 본인의 기쁨은 하늘을 찔렀다. 장기 불법체류자였던 그녀는 이제 미국 시민권자의 버젓한 어머니가 됐다. 난파선처럼 표류해온 자신을 안전한 포구에 정착시켜줄 수도 있는 ‘닻줄 아기(anchor baby)’가 태어난 것이다.

일부 한국여성들 사이에도 미국 시민권자 출산은 선망의 대상이다. 공식집계는 아니지만 한국 산모들이 미국 땅에서 낳는 소위 ‘원정출산’ 시민권자 아기가 매년 5,000여명에 이른다. 본국 전체 출산아기의 약 1%를 점유한다. 원래는 자식의 병역기피 목적으로 상류층에 유행했던 미국 원정출산이 이제는 교육, 취업, 웰빙 등을 목적으로 중산층에까지 확산됐다.

엊그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출생 시민권제도’(birthright citizenship)를 행정명령으로 폐지하겠다는 심중을 밝힌 후 한국 언론은 즉각 “그럼, 원정출산도 이제 끝장인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 등 다른 원정출산 유행국가들의 반응도 비슷할 터이다. 시민권을 노리고 미국에 들어와 출산하는 외국여인들이 매년 3만6,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정출산 외에 위의 개척교회 신도 같은 불체자들이 낳는 시민권자 아기도 연간 30여만명(미국 전체 출산아기의 7.5%)에 이른다. 외국인과 불체자들이 낳은 아기들에게까지 무조건 시민권을 인정해주는 ‘엉터리’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일견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트럼프 자신도 잘 안다. 목적은 따로 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자 전체 유권자의 거의 절반을 점유하는 백인중산층을 더 결속시기 위한 것이다.

앞서 트럼프는 한 공화당 집회에서 자신이 민족주의자(nationalist)라고 공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내셔널리스트의 심볼은 히틀러(나치)와 무솔리니(파시스트)다. 미국에서도 ‘아리안 네이션’(KKK) 따위의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이 오래 준동했다. 트럼프의 막말은 수퍼마켓 흑인 피살, 폭발물 연쇄배달, 유대교 회당 무차별 총격 등 과격 백인들의 테러를 촉발했다.

출생 시민권제도는 꼭 150년 전(1868년) 수정헌법 제 14조로 확정됐다. 남북전쟁으로 두 토막 난 나라의 재건과 국민화합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미국의 치부인 노예제도를 완전 청산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건국이념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시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그에 따라 흑인들이 비로소 시민권자가 됐다.

이 수정헌법의 유일한 예외는 ‘미국정부 통제권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트럼프는 이 문구가 불체자를 지칭한다고 주장하지만 150년 전에는 불체자 개념이 없었다. 자치정부의 통제를 받는 보호지의 인디언 원주민들을 뜻했다. 연방대법원은 1898년 기념비적 판결을 내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비 시민권자 중국인 아들의 출생 시민권을 인정한 것이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의회의 공화당 총수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부터 반대다. 대다수 학자들과 언론도 헛수고라고 비아냥한다. 그래도 트럼프는 밀어붙일 터이다. 소송당할 게 뻔하지만 연방대법원은 자기 사람들인 닐 고서치와 브렛 캐버노로 우편향됐다. 패소하더라도 긴 공론화 과정에서 백인 보수층을 결속시켜 2020년 대선의 지지기반을 굳힐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인 1만3,000여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하루 36명꼴이다. 대략 5,500만명이 2억 6,500만정의 총기를 갖고 있다. 총기보유 권리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는 14조보다 거의 100년 앞서 제정된 구시대 유물이다. 배짱 좋은 트럼프가 손볼 것은 14조가 아닌 2조이다. 역대 아무도 못한 그 일을 해내면 그는 낙제생 대통령에서 위인급 반열로 뛸 수 있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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