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억지 논쟁

2018-11-0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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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미국은 노예주와 자유주로 나뉘어져 극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노예제 폐지에 불을 붙인 사건이 발생한다. 흑인 노예 드레드 스캇이 주인을 따라 자유주인 일리노이로 이주한 것을 이유로 자신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1857년 노예는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으며 그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면 이는 소유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당시 연방 대법원장인 로저 테이니는 이로써 노예 해방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으나 오판이었다. 이 판결에 분노한 노예 폐지론자들은 미 전국에서 노예제를 없애야 한다는 캠페인에 열을 올렸고 남부 노예주들은 연방 탈퇴를 공공연히 외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결국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남북전쟁을 치르고서야 끝났다. 전후 제정된 노예제 폐지를 규정한 수정헌법 13조, 모든 미국 내 출생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토록 한 14조, 모든 시민권자에게 참정권을 보장한 15조는 이렇게 마련된 것이다.


올 중간 선거를 앞두고 시민권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무조건 시민권을 줄 수는 없다며 헌법 개정이나 법을 고치지 않고도 자신의 행정명령만으로 자동 시민권 폐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다수 법률 전문가들은 이를 헛소리로 일축하고 있다.

연방헌법 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하고 미국 사법권의 관할 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국 시민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를 비롯, 미국 출생자의 자동적 시민권 부여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이 가운데 “미국 사법권의 관할 하에 있는”이라는 문구를 가지고 불법 체류자와 그 자녀는 미 사법권 관할 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시민권을 자동으로 부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억지 주장이다. 불법 체류자와 그 자녀가 미 사법권 밖에 있다면 이들은 미국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사실은 연방대법원 판례로 굳어져 있다. 연방 대법원은 1898년 ‘중국인 배척법’에 의해 시민권자가 될 수 없는 중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웡 킴 아크’ 사건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이상 누구나 미국 시민이며 부모의 신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현행 이민법도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의 시민권 취득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투표장에 나오게 하려는 꼼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지구상에 자기 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또한 거짓말이다. 캐나다와 멕시코, 남미 대다수 등 자국 영토 내 출생자에게 시민권을 주는 나라는 30개국이 넘는다.

지금 미국 경제는 실업률이 수십 년래 최저이고 경제 성장률이 3%가 넘는 등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정상적인 대통령이면 이런 경제 실적을 자랑하며 공화당에 표를 달라고 할 것이다. 모든 미국인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연일 중미에서 올라오는 캐러밴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고 이들 중에 범죄조직과 회교 테러분자가 들어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되풀이 하며 반이민 정서 고취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증오와 적개심에 불타는 미국을 만들려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딱하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할 때 “나는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며 최선을 다해 연방헌법을 보전하고 보호하며 수호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는 선서를 한다. 트럼프가 연방헌법과 현행 이민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행정명령으로 상위법을 뒤집으려 한다면 이는 헌법 파괴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미국 내 출생자의 자동 시민권 부여를 폐지하겠다고 발언한 직후 폴 라이언 연방 하원의장은 대통령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원의장이 대통령 말을 즉각 반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번 시민권 논쟁은 어째서 트럼프 같은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어서는 안 되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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