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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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고깔 지붕이 장난감처럼, 발트해 석양은 연인들을 홀리고…

2018-11-02 (금) 탈린=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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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나라 같은 중세도시 ‘에스토니아 탈린’

빨간 고깔 지붕이 장난감처럼, 발트해 석양은 연인들을 홀리고…

파트쿨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탈린 올드시티. 가장 높은 올레비스테 교회 주변으로 고깔 모양의 성탑(城塔)과 오래된 주택이 동화처럼 몰려 있다.

빨간 고깔 지붕이 장난감처럼, 발트해 석양은 연인들을 홀리고…

탈린 올드타운의 기념품 가게. 대부분 마녀처럼 보이는 인형을 앞에 세워 놓았다.


빨간 고깔 지붕이 장난감처럼, 발트해 석양은 연인들을 홀리고…

공장 건물을 사무실, 카페, 식당 등으로 개조한 텔리스키비 지역.


빨간 고깔 지붕이 장난감처럼, 발트해 석양은 연인들을 홀리고…

탈린 올드타운 성벽 길 어디를 걸어도 고풍스럽다. 현재 2km 성벽에 26개 성탑이 남아있다.



성벽과 맞붙은 레이브(Leib) 레스토랑에는 따스한 가을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레이브’는 에스토니아인들이 마가린을 발라 즐겨 먹는 흑갈색 빵 이름이기도 하다. 식사를 마치고 투박한 돌이 박힌 길을 따라 걷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다는 집도 있고, 수평이 맞지 않아 기울어질 것 같은 목조주택도 보인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원통에 빨간 고깔을 쓴 뾰족 지붕 타워가 서 있다. 왠지 낯설지 않다. 동심을 자극하는 놀이공원이나 만화영화에서 자주 봐 왔던 모양이다. 차이라면 화려하게 치장하고 풍선을 건네거나 비누거품으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아르바이트 요정도, 말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도 없다는 점이다.

중세 동화나라 같은 탈린 올드타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올드타운에 대한 첫 인상은 만화 속 동화나라다. 관광객을 위해 잘 지은 세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탈린 올드타운은 13세기부터 세워진 성곽과 건물의 89%가 당시 모습대로 보존돼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 중에서도 중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한 곳이다.

한국인에겐 에스토니아도 탈린도 거리만큼 멀게 느껴진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발트삼국 중 하나라는 것과, 최근엔 세계 최초로 전자투표를 도입해 인터넷 민주주의로 앞서가는 나라라는 정도다. 소련의 통치하에 있었으니 러시아와 별 다를 게 있을까 싶지만, 틀렸다. 탈린은 ‘덴마크인의 도시’라는 뜻이다. 13세기 초부터 에스토니아는 덴마크와 스웨덴, 독일, 폴란드 등 인접국의 각축장이었다. 유럽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 상업이 번성하고, 성벽을 두르고, 도시가 형성된 것도 그 무렵이다. 올드타운을 둘러싼 성곽에서 가장 크고 두꺼운 탑을 ‘뚱뚱보 마가릿 타워’라고 부르는데, 마가릿은 당시 덴마크 여왕의 이름이다. 올드타운 내부는 13~15세기 독일 북부에서 발트해로 상권을 넓혀간 한자동맹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올드타운의 시작은 2개의 원통형 타워가 세워진 비루게이트(Viru Gate)다. 탈린에는 ‘비루’라는 이름이 들어간 호텔이나 거리가 유난히 많다. 에스토니아는 덴마크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비로니아(Vironia)인의 땅이었다. 바다 건너 이웃한 핀란드의 한 종족으로 여겨지는데, 핀란드는 지금도 에스토니아 사람을 비루마(Virumaa)라고 부른다.

비루게이트 앞에는 24시간 편의점 대신 365일 24시간 문을 여는 꽃집이 즐비하다. 아무리 바빠도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등 특별한 날은 꼭 챙기는 에스토니아인들의 습성 때문이라고 한다. 참 로맨틱한 나라다. 하기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때 가장 큰 저항의 수단도 노래가 아니었던가. 세 나라 국민 200만명이 600km 도로에서 손을 잡고 합창을 한 반 소비에트 운동은 ‘노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꽃 향기 맡으며 성문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올드타운이다. 비스듬하게 언덕으로 이어지는 비루대로 좌우로 제법 규모를 갖춘 식당과 상점이 늘어서 있다. 기념품 가게 앞에는 늘씬한 여성 모델 대신 매부리코 노파 인형이 맞는다. 겉모습은 꼭 동화 속 마녀인데, 실제로는 점성술사를 형상화한 인형이란다. 지금도 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민간신앙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흔적이다. 유럽의 도시들이 흔히 그렇듯, 탈린 올드타운에서도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은 교회다. 그러나 실제 종교를 가진 에스토니아인은 드물다고 한다. 2011년 조사에서 이 나라 국민의 70%가 종교가 없다고 답하거나 밝히지 않았다. 일부만이 정교회(약 16%)나 루터교(10%)를 믿는다고 답했을 뿐이다.

올드타운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중세의 분위기도 한층 짙어진다. 눈만 드러낸 음산한 가면을 쓰고 중세 고문기구박물관의 홍보물을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수한 레이스의 전통 복장으로 손님을 맞는 식당도 여럿이다. 그중에서 올데한자(Olde Hansa)는 종업원들의 옷차림뿐만 아니라 내부 분위기도 옛 모습 그대로다. 700년 된 건물을 사용하는 식당 내부에는 전기 조명이 전혀 없이 촛불만 켜 놓았고, 화장실 변기까지 옛날식이다. 식당 문 앞에선 수레를 세워 놓고 전통 복장의 젊은 종업원들이 초콜릿을 바른 견과류를 판매하고 있다. 한국어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메뉴판을 내놓는 걸 보면 이런 전략이 꽤 성공한 듯하다.

올데한자 바로 뒤편은 시청광장이다. 1404년에 지은 옛 시청 건물에는 높이 64m의 8각 탑이 우뚝 솟아 도시의 중심을 잡고 있다. 올드타운의 모든 길은 이 광장으로 연결된다. 오래된 건물들로 둘러싸여 직사각형으로 형성된 넓은 광장은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노천식당으로 활기가 넘친다. 시청 맞은 편에는 1422년 영업을 시작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도 있다. 옛날 약재와 약을 제조하는 기구들을 일부 전시한 것을 빼면 일반 약국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약국 창으로 내다보는 광장의 모습이 한결 고풍스럽다.


시청광장에서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한결 차분해진다. 올드타운 아래쪽에 상업시설이 다닥다닥 몰려 있다면, 위쪽은 덩치 큰 건물이 차지하고 있다. 정부 청사와 의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톰페아 성과, 러시아정교회의 알렉산더네브스키 대성당, 루터교의 세인트마리 성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언덕 꼭대기에는 올드타운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2곳의 전망대가 있다. 코투오차(Kohtuotsa) 전망대에서는 올드타운의 빨간 지붕이 장난감처럼 보이고, 파트쿨리(Patkuli) 전망대에서는 발트해로 떨어지는 석양까지 감상할 수 있다. 해가 질 무렵이면 특히 젊은 연인들이 몰려들어 동화 같은 이 도시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불어 넣는다.

올드타운은 15~16세기 4.7km 성벽에 46개의 타워가 있었지만, 지금은 2km에 26개가 남아 있다. 일부 타워는 3유로를 내고 올라가 성곽의 구조와 병사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올드타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올레비스테(Oleviste) 교회도 3유로를 내면 종탑까지 오를 수 있다. 1500년대에 완성한 이 교회는 첨탑 높이가 159m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기 때문에 선박들에도 길잡이 역할을 했지만, 화재 후 재시공한 지금의 높이는 124m다.

텔리스키비, ‘힙하게’ 거듭난 소련의 흔적

폐쇄적이고 억압된 사회일수록 ‘공공연한 비밀’이 흔한 법이다. 옛 소련 점령하의 에스토니아를 상징하는 일화 하나. 1980년 탈린에서는 모스크바올림픽 요트 경기가 열렸다. 이때 지어진 소코스비루 호텔에는 올림픽 관계자뿐만 아니라 소련의 정보기관 KGB 요원들도 상주하고 있었다. 당시 이 호텔에 묵고 있던 한 소프라노 가수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 휴지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노래하자 직원이 곧바로 휴지를 가져왔다고 한다. KGB에서 모든 방을 도청하고 투숙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해프닝이다.

1917년 제정 러시아의 몰락으로 1차 독립을 이루었지만, 독일과 소련의 밀약으로 1940년 다시 소련에 강제 병합된 후 1991년 재차 독립한 아픈 역사 때문에, 에스토니아 국민은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이지 않다. 지금도 국민의 25%가 러시아계이고, 2차 독립 이전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대부분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한단다.

올드타운 서북쪽 바깥 텔리스키비(Telliskivi) 지역은 옛 소련의 잔재가 가장 ‘힙한’ 모습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사회주의 경제를 떠받치던 공장이 몰려 있던 이곳은 1976년 환경오염 때문에 폐쇄된 후 공공연히 마약 파티가 열리던 우범지역이었다. 2008년 즈음부터는 싼 임대료로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에 음악가들이 연습장과 스튜디오를 차리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2011년에는 지역의 유명 요리사가 벽돌공장을 개조해 에프호네(F-Hoone)라는 식당을 열면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변모했다. 지금은 개성 넘치는 카페와 공예품 가게, 스타트업 기업까지 입주해 탈린의 젊은 문화를 이끌고 있다.

투박한 공장 외벽이 모두 산뜻한 새 옷으로 갈아 입은 것은 아니다. 폐 선로 옆 공터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는 지금도 ‘장마당’의 정겨움과 향수가 남아 있다. 낡은 자동차 보닛에 진열한 물건 중에는 옛 소련의 배지와 구형 카메라가 흔하고, 창고를 통째로 쓰는 헌 옷 가게에선 왁자지껄하게 흥정이 오가기도 한다.

올드타운 북측 바닷가, 모스크바올림픽 기념공연장으로 지은 린나홀(Linnahall)은 내부를 폐쇄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여전히 탈린 시민들의 휴식처다. 지붕으로 오르는 넓은 계단은 마야문명의 피라미드를 떠올리게 한다. 꼭대기에선 요트 경기가 열렸던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바로 옆 크루즈터미널에는 핀란드와 스웨덴을 오가는 대형 유람선이 대기 중이다. 에스토니아의 진정한 독립도 소련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 가는 과정에 달린 듯하다.

<탈린=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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