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사회의 숙제

2018-10-27 (토) 여주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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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로 어느 나라를 방문한 한국인들이 예약 없이 한 식당을 찾았다. 주인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이라고 했더니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는 것이다. 이유는 한국인은 빨리 빨리 급하게 먹고 나가 영업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인들의 ‘빨리 빨리’ 문화는 잘 알려져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도 바로 ‘빨리 빨리’ 라는 단어라고 한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더라도 급한 성격 때문에 문이 닫히기도 전에 닫힘을 누르고, 커피가 나오고 있는 상태에서 커피 팟을 들고 먼저 컵을 넣어 따르는 일도 다반사다.

이러한 문화는 한국이 6.25동란으로 인해 모든 것이 황폐화되면서 이를 어떻게든 빨리 극복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일하다 보니 생겨난 습성이다. 그 결과 1960년대만 해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한국이 이제는 급속한 발전과 함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서양이 200여 년 동안 개척하고 일본이 일찍 문호를 개방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지 100여 년 만에 이룬 근대화를 한국은 불과 몇십년 만에 이룬 것이다.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는 국가의 엄청난 에너지와 도약의 근간이 되면서 한국인들에게 뭐든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한국은 이제 경제는 물론 모든 분야에서 세계인이 놀랄 만큼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려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가 되었다.
IT 최강국으로 자리 잡았고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산 자동차, 선박, 전자제품들이 보란 듯이 활개를 치고 있다. 스포츠, 드라마, 가요 등 연예부문도 한류 돌풍을 일으키면서 세계를 주름잡고 있고 가요만 해도 요즘 방탄소년단 같은 그룹이 세계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인의 위상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 뒤에서 보이지 않는 폐단이 사회 구석구석에 자라잡기 시작했다. 무조건 빨리 빨리 하다 보니 생겨나는 부작용과 문제점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성수대교가 졸지에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한순간에 와르르 주저앉는 등의 엄청난 사고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해외 언론들은 앞 다투어 그 원인이 한국인 특유의 빨리 빨리 문화에 있다고 꼬집었다. 오로지 결과와 성과주의에만 집중하다 보니 나오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요사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끔찍한 사건들이 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방송이나 영화, 가요 등 분야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과 지망생들은 어떻게든 정상을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의 이런 마음과 형편을 이용해 매니저나 감독들의 성폭행이나 폭행 등의 인권유린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 5인조 아이돌 그룹이 기획사의 상습적인 폭행으로 인권이 짓밟힌 사태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빨리 빨리 문화의 어두운 이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정신문화의 실종이다. 온 국민이 오로지 정상만을 추구하다 보니 이에 미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병들고 있다.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참지 못하고 분을 터트리는 일이 예사이다.

지난주 PC방의 아르바이트 학생을 잔혹하게 살해한 한 젊은이의 병든 마음도 이런 사회적 부조리에서 싹튼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거의 100만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그가 반드시 중형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 과연 그 젊은이만의 책임일까.

빛나는 성과와 업적으로 갈수록 한국이 세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박수 보내고 좋아할 것이 아니다. 이를 계속 지켜 나가려면 그 이면에 어둡게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지도 한국인 모두가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여주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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