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언론의 애처로운 ‘자기부정’

2018-10-24 (수) 12:00:00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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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위나라에 미하자라는 미소년이 있었다. 영공의 절대적 총애를 받던 미하자는 방약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다. 어느 날 궁궐에 있는 그에게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영공의 명령을 사칭해 슬쩍 왕의 수레를 타고 대궐 문을 빠져나갔다. 법에 따르면 왕의 수레를 함부로 타는 사람은 발을 자르는 형벌을 받게 돼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영공은 죄를 묻기보다 “효성스럽다”며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

또 어떤 날엔 영공과 함께 정원을 거닐던 미하자가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를 따서 먼저 한입을 베어 문 후 달다며 나머지를 영공에게 건넸다. 있을 수 없는 일로 신하들은 죄를 물을 것을 주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영공은 미하자를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죽이나 나를 사랑했으면 그 맛있는 복숭아를 내게 권했겠는가.”

하지만 외모와 감정은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법. 미하자의 외모가 전과 같지 않게 되자 왕의 총애도 식어갔다. 미하자는 점차 왕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으며 영공을 결국 그를 버렸다. 왕이 미하자에게 물은 죄는 지난날 자신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행동들이었다. 영공은 “이놈은 예전에 과인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타고, 또한 자기가 먹다 남긴 더러운 복숭아 반쪽을 함부로 내게 건넨 자”라고 꾸짖으며 그를 내쳤다.


이 이야기를 남긴 한비자는 “미하자의 행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임금의 칭찬을 크게 받았고 나중에는 벌을 받았다. 그 까닭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임금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행동을 놓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와 미운 생각이 들 때 보인 반응이 180도 달랐던 것이다.

최근 한 보수신문의 북한관련 보도논조에 비판과 조롱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떠올린 고사다. 이 신문은 박근혜 정부 시절 ‘통일은 대박’이라며 통일과 남북경협의 경제적 효과를 부각시키는 장밋빛 기사들을 줄줄이 내보냈다. “북 관광시설 4조 투자하면 연 40조 번다” “통일비용 겁내지만 혜택은 2배”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지면을 뒤덮었다. 예상치 못한 보수신문의 전향적 보도에 진보조차 놀랐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문재인 정부 들어서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으로 화해와 남북경협 분위기가 조성되자 이제는 여기에 시비를 걸고 찬물을 끼얹으려는듯 이전 논조와는 완전히 달라진 내용의 기사들을 싣고 있다. “통일은 이익보다 비용이 클 것” “통일에 부정적인 2030 세대” 같은 기사에서는 남북화해에 대한 못마땅함과 위기감이 드러난다.

왜 ‘통일 대박론’에서 ‘통일 쪽박론’으로 손바닥 뒤집듯 논조를 바꾼 것인지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의 정권이 맘에 들지 않고 밉기 때문이다. 이런 언론들에게 통일이나 남북화해는 정파를 초월해 다뤄야 할 이슈가 아니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바꿔도 되는 정략적 이슈일 뿐이다.

정권이 입맛에 맞느냐 아니냐에 따라 180도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많은 한국 언론의 고질적 병폐이다. 10여 년 전 한 신문이 소주매출 보도에서 보여줬던 교활한 논조가 대표적이다. 당시 정권이 마뜩치 않았던 이 신문은 소주매출이 줄어들자 “소주 사먹을 돈도 없을 정도로 서민들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다 소주매출이 늘어나자 이번에는 “서민들이 소주로 한숨을 달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관성 있는 논조의 신문이었다면 서민들 삶이 나아졌다고 보도했어야 옳았다. 의도에 끼워 맞춰 현상을 해석하는 나쁜 보도의 전형이다.

사안에 따라 언론 간에 입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면 논조 또한 다른 게 당연하고 그 다름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언론이라면 어떤 스탠스를 취하든 최소한의 일관성은 가져야 한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논조가 계속 바뀐다면 그것은 언론의 ‘자기부정’이 된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언론의 언어는 신뢰를 얻기 힘들 뿐 아니라 공허하고 애처롭기까지 하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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