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Time to Vote’

2018-10-17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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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현상은 갈수록 낮아지는 투표율이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들이 주인이 되는 정치시스템이다. 그런데 주인이 돼야 할 국민들이 투표에서 고개를 돌린다면 대의민주주의라는 명분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정치와 선거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에서 기인한다. 품위와 도덕을 저버린 많은 정치인들의 일탈은 정치 자체에 대한 냉소주의를 확산시켜왔으며 여기에 “나 하나 투표한다고 뭐가 달라질까”라는 체념까지 더해지면서 투표율은 계속 하락해왔다.

선거에서 투표율은 결과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치세력들은 자파 지지 유권자들은 결집시키면서 상대 지지 유권자들의 투표는 저지하거나 의욕을 꺾는 전략을 구사한다. 보수는 진보보다 이런 전략에 보다 적극적이고 뛰어나다.


정치학자 앨버트 허시먼은 보수가 결정적 순간에 “관둬라. 소용없다”는 체념의 메시지를 퍼뜨림으로써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고 지적한다. 유권자들에게 무력감을 심어주기 위해 사용하는, 이른바 ‘무용 명제’(futility thesis)이다. 이런 전략이 대체로 잘 먹힌 결과인지 미국의 투표율은 계속 하강곡선을 그려왔다.

미국 대선 투표율은 대략 60% 내외, 그리고 중간선거 투표율은 40%선을 기록하고 있다.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선진국들의 80%선 투표율에 한참 뒤지는 것은 물론 OECD 국가들의 평균 투표율인 70%에도 못 미치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특히 기록적으로 낮았던 지난 2014년 중간선거의 투표율은 경고음을 울려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투표율은 36.4%.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의 33.9% 이후 가장 낮은 투표율이었다. 선거결과에 전체 민의가 공정하게 반영됐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낮은 참여율이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당장의 생계와 생업 때문에 투표에 신경 쓸 여유를 갖기 힘든 저소득층과 직장인들의 형편도 분명 한몫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는 11월6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투표할 시간을 허용해 주자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Time to Vote’라 명명된 이 캠페인은 아웃도어 브랜드인 파타고니아가 시작해 지금은 월마트, 갭, 사우스웨스트 항공, 카이저 퍼너먼티 등 150개 이상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Time to Vote’는 ‘투표를 해야 할 때’와 ‘투표를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중의적 표현이다. 민주시민의 기본적 자세를 언급하면서 직원들에게 이를 위한 실질적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가 읽힌다.

파타고니아는 아예 중간선거일을 휴무일로 선언했으며 리바이스는 본사직원들에게는 5시간, 매장 직원들에게는 3시간의 투표시간을 허용하기로 했다. 차량공유업체인 리프트는 투표 당일 투표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할인요금을 제공하고 저소득층 유권자들에게는 무료 라이드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투표율을 제고하기 위한 기업들의 이런 노력과 동참은 이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에 비춰볼 때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낮은 투표율로 고민하던 일본의 경우에도 투표확인증을 지참하면 참여업소들에서 할인을 받는 ‘선거세일’ 제도를 도입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 민주주의를 대표성의 위기에서 건져내려면 이처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표율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일부 정신 나간 보수는 투표율 억제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한심하다. 몇 년 전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투표시간을 연장하자는 안이 나왔을 때 이를 극력 반대했던 한국의 정치세력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들이 내세웠던 논리의 하나는 “투표율이 높은 나라는 후진국”이라는 것이었다. 궤변의 수준을 넘어선 가짜뉴스였다.

유권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투표는 어떤 경우에도 이념적 다툼이나 정치적 계산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참여는 ‘Time to Vote’ 같은 배려가 뒷받침될 때 한층 더 활성화 될 수 있다. 이 캠페인의 취지에 공감해 오는 11월6일 직원들을 배려하는 쿨한 면모의 한인업주들을 많이 보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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