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어즈의 몰락

2018-10-16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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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시어즈는 1863년 미네소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16살 되던 해 아버지가 주식 투기 열풍에 휘말려 전 재산을 날리고 죽자 철도 역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건이 발생한다. 동네 보석상에 주문 착오로 시계 상자가 잘못 배달된 것을 본 시어즈가 이를 인수해 동료들에게 팔아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이 작은 일이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친 그는 1886년 우편으로 시계를 파는 ‘RW 시어즈 시계 회사’를 차린다. 다음 해 시계 수리공인 앨버 로벅을 만나 동업을 결심하고 시카고로 무대를 옮겨 첫 시어즈 캐탈로그를 발행한다.

장사가 잘 되자 회사를 비싼 가격에 팔고 아이오와로 이주한 시어즈는 곧 그곳 생활에 싫증을 내고 1892년 시카고로 돌아와 로벅과 함께 ‘시어즈, 로벅 회사’를 세운다. 그 때까지 시골 농부들은 동네에 있는 잡화점에서 생필품을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건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주인 마음대로였다. 그런 농부들에게 수많은 물품을 정찰제로 파는 시어즈 캐탈로그는 복음과 같았다. 판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1894년 300페이지를 돌파했던 캐탈로그는 1895년에는 500페이지를 넘었다.


시어즈는 1906년 소매기업으로는 사상 처음 주식을 상장했으며 1924년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만 들어갈 수 있는 다우존스 산업 지수에 편입된다. 처음 시어즈는 주로 농부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며 도시 인구가 급속히 늘자 농촌 고객만으로는 성장에 한계를 느낀 시어즈는 1925년 시카고에 첫 백화점을 연다.

자동차 운전자를 위해 주차장을 마련한 것도, 주말 손님을 잡기 위해 일요일에 문을 연 것도, ‘만족 보장. 불만시 전액 환불’을 모토로 내건 것도 시어즈가 처음이다. 시어즈가 미국 최대 소매업소로 일어서면서 미국인들 가운데 시어즈 캐탈로그는 ‘소비자의 바이블’로 불리기 시작했다. 1974년 완공된 110층짜리 시카고 시어즈 타워는 한 동안 세계 최고층 빌딩이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진단하고 트렌드를 선도하던 시어즈도 헛발질을 하기 시작한다. 소매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동산과 증권 등 금융분야까지 진출하겠다며 1981년 딘 위터와 콜드웰 뱅커를 인수한 것이다.

그러나 금융과 부동산은 소매와는 전혀 다른 노하우가 필요한 업종이다. 시어즈가 잘 모르는 분야에서 허둥대고 있는 사이 월마트와 홈 디포 등이 치고 들어오며 시어즈는 수입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어즈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캐탈로그마저 중단시켜 버렸다.

기울기 시작한 시어즈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90년대 인터넷 보급과 함께 일반화된 온라인 시장이다. ‘모든 것을 파는 가게’였던 시어즈의 별명은 어느 새 아마존이 가져갔다. 한 때 소매업의 강자였지만 망해가던 K 마트를 인수한 투자가 에드워드 램퍼트는 2004년 시어즈를 합병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노렸으나 한번 기울기 시작한 거함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6년 15억 달러의 이익을 내며 반짝 했으나 2010년 수익은 0로 줄어들고 그 다음 6년간 100억 달러가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낡고 허름한 매장에 구닥다리 재고, 무능하고 맥 빠진 직원들만 남은 시어즈를 사람들은 외면했다. 2010년 3,500개가 넘던 시어즈 매장은 불과 7년 사이 695개로 줄어들었으며 매출도 급속히 감소했다. 재정이 악화되면서 납품업자들은 선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는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지난 수십년 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어즈가 15일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 한때 미국 최대 소매업체였던 시어즈의 이번 파산으로 미국 소매업계는 새 역사를 쓰게 됐다. 시어즈의 몰락이 올해 아마존이 시가 총액 1조 달러를 넘으며 미 최대기업이 되고 그 창업자 제프 베조스가 빌 게이츠를 제치고 미국 최고부자가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아무리 한 때 잘 나가고, 오래되고, 규모가 큰 기업이라 하더라도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비자의 기호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시어즈의 몰락은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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