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흑암은 몰려들고 있는데…

2018-10-15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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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이 몰려들고 있다’(Darkness Descends)-. 코먼터리지의 제목이다.

인터폴(Interpol), 그러니까 전 세계 192개 국가가 가입한 국제형사경찰기구다. 그 인터폴의 총재가 어느 날 실종됐다. 첫 중국출신 총재인 멍훙웨이(孟宏偉)가 모국 출장을 간다며 집을 나간 것은 9월 25일이다. 이후 그의 종적은 사라졌다. 그러고 두 주 가까이 지난 10월 8일 중국공안은 그가 뇌물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명색이 국제기구의 수장이다. 그런 멍훙웨이를 중국공산당 정부는 멋대로 구금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체포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모국의 체제를 비판했다. 그런 그가 터키주재 모국의 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증발됐다. 사라진 사람은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쓰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쇼기다. 그는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영사관에 들어가는 순간 끌려가 바로 살해되고 그 시신은 토막 나 밖으로 빼돌려진 것으로 보인다” 터키당국의 해석이다.

왜. 사우디왕실, 특히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전횡을 맹렬히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사우디 왕실의 궁궐, 그 깊고 음침한 곳에서나 가능하다고 할까. 그런 엽기적 살인극이 해외무대에서 버젓이 저질러진 것이다.

인터폴 총재 구금도 그렇다. 200만에 가까운 위구르인을 재교육 명목으로 캠프에 집단 구금했다. 그런 중국 공산당 당국이 제멋대로 검은 손을 뻗은 것이다. 뭐랄까. 천하에 군림하는 중국은 국제기구 정도는 안중에 없다고 할까. 그런 오만한 태도로.

비(非) 자유주의 권위주의 정권들의 횡포가 날로 극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해외에도 마수를 뻗쳐 납치에, 살인을 버젓이 저지를 정도다. 공공연하게 침해되는 인간의 자유권, 코먼터리지는 그 상황을 보도하면서 ‘흑암이 몰려들고 있다’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자유민주체제가 흑암 가운데에 죽어가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로버트 케이건의 지적이다. 비슷한 타이밍에 일어난 두 사건, 인터폴 총재 증발사건, 카쇼기 실종사건, 거기다가 위구르인 대량구금 사태 등을 그는 이런 시각으로 진단한 것이다.

어떤 특정 이벤트나 한 특정 개인의 운명은 때로 세계적 현상, 혹은 역사적 트렌드를 상징한다. 이 사건들이 바로 그렇다는 거다. 미국이 지탱해온 자유민주주의 국제질서가 와해되고 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세계질서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건강과 흡사하다. 건강할 때는 모른다. 잃게 됐을 때 그 소중함을 안다. 세계질서도 무너졌을 때에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거다. 파쇼에, 나치 그리고 스탈린의 볼셰비키 독재세력이 저마다 발호하자 그 때야 기존의 유럽중심의 국제질서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1930년대의 교훈이다.

미국은 세계라는 정원을 거의 혼자 가꾸어왔다. 그게 지난 70여년의 세월이다. 그 미국이 정원 가꾸기를 주저하고 있다. 그러자 잡초가 자라난다. 곱게 조성됐던 정원은 점차 정글로 변해가고 있다. 문제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평온해 보이는 세월- 그게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는 안일함에 젖어서.

거칠게 없다. 담대함이 지나쳐 오만하게까지 비쳐진다. 그러면서도 아주 영악하다. 나름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문재인의 청와대, 그리고 한국의 여권 핵심에서 쏟아지고 있는 말과 행보들이 그렇다.

얼핏 보면 각개약진 같다. 그런데 일관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일사불란하다. 그 모양새가 하나의 흐름을 상징하는 것 같다. 방향성이 일정하다는 점에서 특히.

“극우보수 세력을 철저히 궤멸시켜야 한다” 대선 때 이해찬 현 민주당 대표가 유세장에서 한 말이다. 상당히 섬뜩하게 들린다. 북한의 대남 비난용 어휘와 너무 닮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1년 반 정도의 세월이 지났다. 같은 말이 다시 들려온다. 이번에는 마치 북한당국과 합창이나 하는 듯이. 그것도 아주 거리낌 없이 큰소리로.

이 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의 김영남이 통일위업 성취에 남녘 동포도 힘을 합쳐 보수타파 운동에 나설 것을 주문하자 이에 화답하듯이 정권을 절대로 뺏기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보안법 개폐문제도 거론했다.

한국의 보수진영은 북한당국과 좌파 문재인 정권의 공동의 적이 되고 만 것이다.

“예의 바르고 솔직담백하며 아주 겸손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영국의 BBC 방송과의 대담을 통해 김정은에 보낸 찬가다. 이런 말도 했다.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고 자신들의 체제만 보장된다면 핵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약속했다”

선의로 가득 차 보인다. 그러나 말과 다른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로 볼 때 그보다는 방향성을 이미 정해놓고 하는 계산된 발언이 아닐까.

‘한미동맹에 우선되는 것은 우리끼리라는 민족주의 통일노선이다. 이를 위해서는 김정은 수석대변인 노릇도 마다 않겠다’- 그 발언 속에 그런 결기까지 엿보인다면 지나친 말일까.

파산은 천천히 아주 더디 오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날 눈을 떠보면 파산상황에 처해 있다. 안보상황도 흡사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미동맹의 마찰음, 그 소리가 점차 굉음으로 번져가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흑암이 몰려들고 있다. 그것도 아주 급격히…’- 한국이 처한 상황이 아닐까.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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