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2월 7일 뉴욕의 ‘죤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은 수많은 보도진과 소녀팬들이 영국의 4인조 록밴드 ‘비틀스’의 미국 공연차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트랩에서 나오면서 기다리고 있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자 소녀들은 괴성과 함성으로 응답했다. 바로 이 순간은 ‘비틀스’가 미국 땅을 내딛는 첫 발걸음 이라고 기자들은 보도 했지만 필자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서막의 종소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만큼 이 날의 미국방문은 뜻 깊은 순간이다. 그리고 이틀 후 2월 9일 일요일 저녁 8시 CBS 방송 프로인 ‘에드 셜리반 쑈’의 프로그램에 출연 예정인 ‘비틀스’의 공연을 시청하기위해 미국의 7천만 시청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All My Loving’을 시작으로 모두 10곡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최고 하이라이트 노래는 ‘I Wanna Hold Your Hand’ 과 She Loves You’ 였다. 이노래들을 연주할 땐 CBS 스튜디오에서 직접 공연을 보고있던 10대의 소녀팬들은 거의 열광과 희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틀스’ 음악을 즐겼다.
두번째 ‘에드 셜리반 ‘공연은 일주일 후 2월 16일에 이루어졌다. 이 공연후 미국은 영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4명의 록밴드의 열기 속에 매료되어 ‘ 라디오 디제이’들은 이들의 노래들을 하루종일 라디오에서 들려 주어야했고 또한 이들의 노래들은 팝 차트를 거의 독차지 하다시피 했다. 1964년 한해 동안 6개의 노래가 빌보드 팝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No.1 정상에 기록한 노래는 : I Wanna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Can’t Buy Me Love, Love Me Do, Hard Days Night 그리고 I Feel Fine 이었다.
‘비틀스’가 출연 예정인 ‘에드 셜리반 쑈’의 방청권은 모두 소진되어 예비권이 없었다. 정치거물 ‘리처드 닉슨’과 CBS TV 뉴스 엔커인 ‘월터 클론키트’ 들도 딸들의 성화로 방청권을 CBS 방송국에 청탁했다. ‘에드 셔리반’ 조차 자신의 쑈프로 중간에 방청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빌려 줄 수 없느냐? 대신 다음번 방청권을 주겠다고 하소연 할 정도로 그 열기는 뜨거웠다.
많은 평론가들은 ‘비틀스’ 신드롬이 허리케인(태풍) 처럼 순식간에 발생한 이유를 각자 나름대로 설명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의 우상이자 기둥이었던 대통령이 갑자기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암살을 당한 후 한 동안 미국 국민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미국민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치료해줄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로부터 8주 후 ‘비틀스’가 등장하여 이들의 노래가 허탈에 빠진 미국인들의 상처를 씻어 주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1963년 11월.’에드 셜리반 쑈’의 진행자 ‘에드 셜리반’은 부인과 함께 영국을 방문차 런던 공항에 있을 때 공항이 소녀들의 함성으로 매우 시끄러워 공항 관리 담당자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소란 인가 ?” 공항 관리 왈 ‘비틀스’가 스웨덴 공연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라 그들을 환영하는 팬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혼잣말로 ‘ Who is the Beatles’ 라고 중얼거리며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그는 이들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국 국내는 물론이고 독일과 북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확인 후 ‘비틀스’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접촉하여 자신의 프로인 ‘에드 셜리반 쑈’에 출연을 요청했다.
이것은 영국의 록밴드에게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미국이 전세계의 팝음악계를 장악하고 있을 시절이라 영국은 한 수 아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록밴드를 미국 최고의 TV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일종의 모험이었다 . 허나 그는 성공을 확신하고 4인조 더벅머리 ‘비틀스’에게 TV 출연 초청장을 보냈고, 그의 모험은 미국 역사에 기록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후 ‘비틀스’의 성공을 이끌어준 계기이자 디딤돌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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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문 라디오 DJ 및 팝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