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반근착절’이란 말을 삼키며

2018-09-24 (월) 이성호 /피라밋 레이크 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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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착절(盤根錯節)이란 말은 후한의 7대 황제가 어려서 어머니 태후가 정사를 맡았는데, 외적으로는 침략을 당하고 내적으로는 신하들의 정쟁으로 정사가 얽히고설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을 때 그 상황을 표현하면서 나온 고사성어이다.

내가 이 단어를 쓸 만큼 큰일을 하는 것은 없지만 매년 하는 행사인 ‘민족시인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얽혀 마음이 복잡하다.

처음 이 산장에 들어올 때는 60대였는데 이제는 일이 겁나는 나이가 됐다. 문학의 밤 행사 준비가 간단해 보여도 신경 쓸 일이 많다. 첫째로 다른 문인들의 행사나 한인사회의 큰 행사와 일시가 겹치지 않아야 좋고, 행사 당일의 날씨는 어떤지, 순서를 맡은 분들에게 별일은 없는지, 또 프리웨이의 원활한 소통과 저녁준비에는 차질이 생기지 않을지, 자질구레한 걱정들이 주최자인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산장에 갈대가 한창인 오는 29일 제 15회 민족시인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지난 14년 동안의 그 행사가 흑백 필름의 무성영화처럼 흐린 눈앞을 지나간다.

컴퓨터만 켜면 민족시인들의 작품과 그들의 일대기가 나오지만, 특별히 민족시인들의 날을 정해놓고 한 마음으로 모여 그들의 시를 낭송하노라면, 애국 애족의 전류가 온 몸에 전율하고 코끝이 매워진다.

우리 대한민국이 수치스러웠던 과거를 뒤로 하고 오늘의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훌륭한 지도자들과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민족시인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명작과 문호들의 이름은 알면서 민족시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모른다면 민족적 자존감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산장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어울린다는 이유로 내가 회장직을 맡아 14년 장기집권(?)하고 있지만, 그동안 한결 같이 이름도 빛도 없이 봉사해준 동지들을 생각하면 새삼 고맙다.

나는 이제까지 ‘민족시인 문학 선양회 회장’이라는 직함이 참 어색했다. 무슨 권력이나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존경받을 만한 일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내 임무를 자랑스러워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이 행사를 같이 준비하고 먼 길을 달려오는 모든 분들도 민족 자존심을 걸고 이 참여를 자랑스러워했으면 한다.

요즘 반근착절이란 고사성어가 머리를 맴도는 것은, 이 행사 때문만이 아니라 아마도 떠나온 모국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옛날 후한 때 우후라는 사람의 말대로 “생각은 쉬운 것을 찾지 않고, 일은 어려운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을 떠올린다.

복잡한 생각일랑 말고 이번 행사 때는 대형 태극기를 걸고 그 앞에서 애국가도 3.1절 때와 해방의 날을 상기하며 목청 높여 불러보아야 하겠다.

각지에서 모인 분들과 한 마음으로 자랑스런 민족 문인들의 명작들을 한 목소리로 크게 낭송해야 하겠다. 그리고 별빛아래 모닥불 피워놓고 고구마를 굽고, 다방커피를 마시며 세상걱정 다 내려놓고 한바탕 깔깔거리며 밤을 새웠으면 좋겠다.

<이성호 /피라밋 레이크 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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