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정은의 마지막 기회

2018-09-19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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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비상식적인 트럼프의 난정(亂政)을 지켜보면서 그의 첫 임기 중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협정이 현실화 되고 그가 재선에는 실패하는 것이 향후 한반도와 미국, 그리고 세계를 위한 최선의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의 재선이 미국사회와 세계정세에 초래할 혼란과 불안정성은 상상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

하지만 수십 년 적대관계에 있던 북미관계 변화에 물꼬를 튼 것은 트럼프의 개인적 캐릭터와 결단이었다는 걸 부인하기는 힘들다. 미국 조야의 북한에 대한 여전한 의구심과 회의론 속에서 북미대화를 지속시킬만한 동력의 확보 또한 전적으로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북미대화는 거의 전적으로 트럼프의 판단과 의지에 의해 지금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최근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북미 간 이견과 줄다리기는 우려를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비핵화 절차와 관련해 드러나고 있는 미국과 북한의 입장차이가 빠른 시일 내에 해소되지 못할 경우 북미대화는 물 건너가고, 자칫 비핵화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트럼프가 놓여있는 국내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는 현재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빠져 있다. 연일 백악관 내의 혼란한 상황이 폭로되고 참모들의 이탈도 가속화되고 있다. 지지율도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할 경우 탄핵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사면초가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들이 트럼프의 정치적 몰락으로 이어질 경우 북미대화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고 봐야 한다. 물론 북미관계도 급속히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북한으로서는 마냥 배짱을 부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중재를 위해 미국과 북한을 열심히 오가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양측의 신뢰가 두터워 보인다는 점이다. 평양에서 열린 3차 남북정상회담은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접점을 찾기 위한 문 대통령의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언론인 밥 우드워드의 신간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에는 트럼프가 취임 초 무역과 주한미군을 빌미로 문 대통령을 마구 몰아붙였던 일화들이 나온다. 그랬던 그가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문 대통령에 대해 친근감을 드러내고 있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치기어린 나르시시즘을 잘 도닥여준 덕분이다. 김정은 또한 여러 차례의 만남을 통해 문 대통령과 개인적 신뢰를 쌓았다.

오랜 시간 적대관계 속에 놓여 있던 두 나라가 직접 접촉을 통해 입장 차를 해소해 나가기란 쉽지 않다. 양측의 신뢰를 얻는 중재자가 중요한 이유는 두 당사자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설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평양에서 열린 3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곧 이어질 유엔총회에서의 문 대통령과 트럼프 간 한미정상회담은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향한 대단히 중요한 일정이 될 수밖에 없다.

해빙무드 속에서 북한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고 최근 북한을 다녀온 한국 언론들은 한입으로 전하고 있다. 수년 새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평양의 스카이라인과 활기찬 거리의 모습, 그리고 과학·영어·IT 교육열 등이 이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변화는 김정은 체제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 추세이기도 하다. 김정은이 이런 추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려 한다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는 필수적이다.

트럼프의 처지와 미국 내 정치상황으로 볼 때 김정은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되돌리기 힘든 수준의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빠른 시일 내에 맞교환되지 않을 경우 북미대화는 언제든 물 건너 갈 수 있다. 그런 김정은에게 문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선 이번 3차 남북정상회담은 천재일우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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