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반도 해빙기에 첩보영화를 보다가

2018-08-15 (수) 류정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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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한 영화 ‘공작: 암호명 흑금성’은 개인적으로 군대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있었던 북풍(선거 직전 총기사격 대북요청) 사건을 재구성한 내용인데 당시 말년 병장의 특권으로 후임병들은 자는 사이 밤새 개표 방송을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처럼 출구조사와 사전예측 시스템의 신뢰도가 높지 않아 실제 개표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당선자가 가려졌던 터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을 담당하는 법조팀 바이스로서 97년 대선은 또 다른 기억을 남겼다.

국정원의 전신인 과거 안기부가 김영삼,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 도청을 위한 소위 ‘미림팀’을 조직해 유력 인사들의 사생활까지 방대하게 녹음했던 X파일 사건 취재로 불면의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북한은 물론, 안기부와 국세청 등을 동원한 각종 선거 조작 의혹과 정재계 인사들의 유착, 대기업 특혜는 물론, 특정인들의 은밀한 내용들까지 조사한 파일만 270여개였는데 사실은 최소 3,000개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간의 의혹이 커지면서 검찰은 사상 초유의 국정원 압수수색에 나섰고 당시 검찰 내부에서는 “잘못 들어갔다가는 총격전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리고 또 다시 10여년이 흘러 과거 목격했고 취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조우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10년 전, 20년 전과 달리 새롭게 눈길을 끈 부분은 역사적 사건의 방아쇠를 당긴 동기가 인간의 탐욕이었다는 것이다.

선거 승리를 위한 안보 이슈 부각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북한에 제안하는 남한의 정치 세력과 국제적 고립에 자연재해로 겪게 된 경제난을 ‘고난의 행군’으로 포장해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김정일 정권의 탐욕은 원색적으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김정일은 96년 총선 당시 ‘총풍’ 요구에는 응했지만 97년 대선 직전 서해 5도 도발 요구는 묵살했다. 남북한의 두 주인공이 서로 호연지기를 칭찬하며 ‘브로멘스’ 분위기를 냈고, 김정일 또한 대범한 결단을 내린 듯 비춰졌다.

그러나 이전부터 추진해 온 남북한 합작 광고 제작과 예정된 관광 사업이 보다 큰 이익을 남길 것이란 계산이 이미 섰기 때문에 대선 개입을 자제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 한줌 인간들의 허망한 탐욕이었다는 교훈이 앞으로 만들어질 미래의 역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재현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류정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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