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파괴적 ‘행동편향’

2018-08-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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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전 끝난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역대 최다인 총 29개의 페널티킥이 선언됐다. 이번 대회에 처음 도입된 비디오판독(VAR)의 영향이 컸다. 한국도 두 차례의 페널티킥 때문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페널티킥은 키커와 골키퍼 간의 피를 말리는 심리게임이다. 서로의 생각을 헤아리며 공을 차고 몸을 날린다. 그런데 페널티킥을 유심히 살펴보면 강하게 구석으로 차지 않고 가운데로 가볍게 툭 차서 넣는 공이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학자가 축구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들과 골키퍼를 관찰한 결과 차는 선수들의 3분의 1은 골대 가운데로, 3분의 1은 왼쪽으로, 나머지 3분의 1은 오른쪽으로 공을 보냈다. 반면 골키퍼들의 절반은 왼쪽으로 몸을 날렸고 다른 절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서 있기 보다는 무조건 한쪽으로 몸을 날리고 보는 골키퍼들의 이런 경향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무언가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는 ‘행동편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사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고 해도 무언가를 해야만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이고, 자기합리화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잭 보웬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불운을 겪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무언가 행동하고 나서 불운을 겪을 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보다 더 크다”는 말로 이런 심리를 요약했다.


움직이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편향은 많은 경우 능동적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국가나 기업의 지도자가 지나친 행동편향을 지니고 있을 경우 그렇다. 자기과시형 성격을 가진 지도자일 경우 그럴 위험은 한층 더 높아진다.

우리는 이런 부정적 행동편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지도자를 이미 겪어봤다. 그는 마치 강박증에 사로잡힌 것처럼 천문학적 혈세를 쏟아 부어 끊임없이 자연과 해외유전을 파헤쳤다. 그 후유증은 심각한 환경파괴와 막대한 국고손실로 되돌아오고 있다.

최근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이 합리적 절차와 평가를 무시한 채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된 사업이라는 내용의 감사결과를 발표했다. 비용대비 경제편익이 0.21에 불과하다니 ‘희대의 경제사기극’이란 비판이 딱 들어맞는다.

개인적 차원의 행동편향이 가져오는 결과는 오롯이 그 개인이 짊어지면 된다. 그러나 국가지도자의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다. 현란한 말장난에 속아서, 혹은 잘 몰라서 그 사람을 뽑은 죄밖에 없는(사실은 이게 원죄일 수 있지만)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부담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판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통치 혹은 국정수행이라는 명분으로 무조건 면죄부를 주는 게 옳은지는 의문이다. 물론 좋은 의도로 시행한 정책의 나쁜 결과에 대해 사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무능 역시 죄를 따지기 힘들다. 하지만 지도자 개인의 탐욕과 공명심을 충족시키려 합리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한 채 밀어붙인 ‘정책재앙’에 대해서는 단죄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짓 명분으로 이라크전을 일으켜 무고한 인명 살상과 막대한 전비지출을 초래한 조지 W. 부시를 살인범죄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는, 부시 임기 말기 미 법조계 일각에서 나왔던 주장은 이런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 부시 심판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법조인인 검사 출신 빈센트 불리시오는 이라크 전쟁을 “부시와 그의 측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계획적으로 저지른 ‘미국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자 살인범죄 행위”라고 규정한다.

오로지 자신과 측근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어처구니없는 토목사업을 강행하고 자연과 환경을 심하게 훼손한 이명박에 대해서도 같은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만 한다. 실제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게 많은 법조인들의 견해다.

“이미 개인비리 혐의로 수감돼 있지 않느냐”는 등의 이유로 동정심을 가질 사안이 아니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는 국자지도자의 과잉 행동편향에 브레이크를 걸고, 추후 통치행위를 빙자한 그 어떤 ‘사악한 탐욕’도 발붙일 수 없도록 엄중한 단죄가 이뤄져야 한다. 기록적 폭염 속에 극심해진 녹조현상으로 이제는 ‘녹차라테’를 넘어 아예 ‘잔디밭’이 돼가고 있는 강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확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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