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인 체면문화에 대한 단상

2018-07-17 (화)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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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체면문화에 대한 단상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서울과 워싱턴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흥미로운 차이점이 하나 있다. 한국의 회사원들은 출근복장에 걸맞은 하이힐이나 정장 구두를 신고 출근해 사무실에 도착해선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미국의 직장인들은 정장차림에도 다소 우스꽝스럽게 운동화나 슬리퍼를 신고 출근해 사무실에 도착해선 옷차림에 맞는 신발로 갈아 신는 것이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한 한국의 체면문화와, 자신의 필요와 정체성이 무엇보다 우선인 미국의 실용주의 문화 간의 차이가 엿보이는 예이다.

한국여자들은 시장에 갈 때도 차려입고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뒷동산으로 단풍놀이를 가더라도 에베레스트 행 버금가는 기능성 등산복을 갖춰 입고, 집 앞 수퍼마켓에 갈 때도 루즈는 바르고 가야 동네 창피하지 않은 참 재미있는 문화다(덕분에 전 세계 패션, 화장품 산업, 성형시장 등을 선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성공한 기업가가 미국의 스티브 잡스처럼 터틀넥과 청바지, 운동화 차림의 단벌신사였다가는 “남들이 뭐라 한다”는 주변의 등살에 못 이겨서라도 당장 백화점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품위 유지비’ ‘체면 유지비’는 어느새 필수 지출항목을 넘어 현대인들의 소비심리를 가장 잘 반영하는 대표적 소비형태로 자리 잡았다. 다수의 설문조사에서 결혼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이유로 ‘체면과 주위 시선 때문’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무려 20여년 전 시행된 한 국민의식조사에도 45.1%의 응답자가 소형승용차를 기피하는 이유를 ‘체면 때문에’라고 답해 ‘안전도가 떨어져서’ ‘승차감이 나빠서’ ‘성능이 안 좋아서’ 등의 이유를 훨씬 앞섰다(한국 환경정책 평가연구원, 1997).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들에게 체면이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이 분명하다.

체면문화야 어느 나라에나 어느 정도씩은 있겠지만 서구의 개인주의 사회에 비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 어려운 공동체 중심의 아시아국, 특히나 유교사상과 양반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는 생활 전반에 걸쳐 체면이 중요하지 않은 영역이 없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아니 쬔다”는 옛 속담처럼, 의식주는 물론이고 진학, 취업, 성적, 직급, 친구, 지위, 각종 경조사에다 심지어 죽고 사는 문제까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모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체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자 베스트셀러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의 저자인 다니엘 튜더는 한국사회에서 체면은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체면 인플레’가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독일 출신의 미국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는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노이로제를 ‘슈드비 콤플렉스(should be complex)’라고 규정하였는데, 한국사회에선 이 ‘슈드비’마저 경쟁이니 그로부터 오는 부담과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못하면 못한다고,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대는 한국인 친구들이 유난히 많다. 게다가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생각, 가치관, 꿈, 목표, 취향이라고 믿는 것 중 많은 부분이 실제로는 부모의 생각, 가족의 생각, 친구의 생각, 선생님의 생각, 상사의 생각, 사회의 생각이지 않은가. 타자지향성 문화에 맞추느라 개개인의 자유와 욕구, 성향과 역량은 체면이라는 가치 뒤로 숨고 만다.

물론 체면관리의 긍정적 효과도 경시할 수는 없다. 체면 때문에 공중도덕을 지키고 체면 때문에 남을 먼저 배려하는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지나친 체면 민감성에는 절제가 필요해 보인다. 체면중시 문화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에 크게 일조하고 있으며, 한국에선 명예훼손으로 형사소송이 가능하고 관련 법안과 처벌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난히 더 엄격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체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개인의 개성과 자아실현은 물론, 사회와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경쟁과 체면 중시가 주 원인인 수도권 주민의 스트레스로 발생하는 사회비용이 연간 37조5,000억원에 달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경기개발연구원, 2012). 개개인을 포용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을 갖춘 사회, 체면 스트레스가 절감되는 사회가 되어야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 시선에 가두지 않는, 개개인의 행복이 당당한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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