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침묵을 깨는 용기

2018-07-11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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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1961년 인간의 복종심리에 관한 기념비적인 실험을 한다. 밀그램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선생’으로 지목된 피험자들은 실험실 방안 의자에 양팔이 묶이고 전극봉을 손목에 부착한 채 앉아 있는 ‘학생’들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받았다. 처음 15볼트로 시작한 전기충격은 계속 높아져 450볼트까지 올라가도록 돼 있었다(실제 전기충격은 없었으며 학생들은 실험을 위해 고용된 연기자들이었다).

당초 연구진은 ‘학생’들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을 때 ‘선생’들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학생’들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선생’들이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 버튼을 눌렀다. 450볼트 직전까지 버튼을 누른 피험자는 40명 가운데 26명, 즉 65%에 달했다. 이 실험은 비합리적 명령과 부당한 권위에 순종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주었다.


맹목적인 복종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태도이다. 그래서 부당한 명령인줄 알면서도 순종하는 것은 물론 가끔은 명령자의 의중과 심기를 헤아려 먼저 행동에 나서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런 복종을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많이 목격하고 있다.

이것을 적극적 복종이라 한다면 침묵과 외면은 소극적인 복종이다. 불의와 부조리, 비리, 그리고 거짓을 보면서도 입을 다물거나 고개를 돌려버리곤 한다. 복종하지 않거나 입을 열었을 때 돌아올 불이익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작가 목수정씨는 ”2014년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대한항공 직원들이 왜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왜 홀로 회사와 맞서는 사무장을 지지하기 위한 파업이 없는가에 대해 놀라워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행위가 그토록 오랫동안 아무런 저항 없이 자행될 수 있었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밀그램의 실험 결과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먹구름 속에도 한줄기 희망의 빛은 있는 법. 그렇다면 피험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는지 밀그램은 알고 싶었다. 추가실험을 통해 그가 밝혀낸 사실은 피험자가 다른 사람의 복종거부 행동을 관찰했을 때 같은 행동을 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었다.

연구진과 공모한 피험자가 버튼누르기를 거부하고 다음 피험자가 이것을 볼 수 있도록 하자 그 피험자 역시 버트누르기를 거부했다. 마지막까지 버튼을 누른 사람은 10%에 불과했다. 혼자서만 고민하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65%가 버튼을 눌렀지만 다른 이들의 거부행동을 보게 되자 그 비율은 10%로 뚝 떨어졌다.

오너 일가의 갑질에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침묵해오던 대한항공 직원들이 단체행동에 나선 것은 ‘물컵 사건’ 이후 소수의 직원들이 회장 집안의 비리와 횡포를 폭로하고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직원들은 단톡방을 만들어 비리와 횡포 사례들을 모으는 한편 주말 촛불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최근 사상 초유의 ‘기내식 대란’ 사태를 겪은 아시아나항공 직원들 역시 ‘침묵하지 말자’는 명칭의 익명 단체 카톡방을 만들어 비리제보를 받는 한편 집회를 통해 총수퇴진을 외치고 있다.

“직원들이 처음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지만 박창진 사무장이 행동하는 걸 보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대한항공 한 기장의 발언은 복종에 저항하고 침묵을 깨는 보통사람들의 용기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지를 상기시켜준다. 밀그램의 추가실험이 증명했듯이 말이다.

‘땅콩회항’ 사건 때 고개를 갸우뚱 했던 프랑스 사람들도 침묵 깨기에 나선 항공사 직원들을 본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 않을까. 복종을 거부하는 소수의 용기 있는 행동에서 시작돼 서서히 확장되는 연대는 그 조직과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힘이 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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