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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비우니… 시선이 깃들고, 발길이 멈췄다

2018-07-11 (수) 12:00:00 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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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구 후암동 복합주거건물, 남산 자락 아래 소월길 인근, 2층 가운데를 뚫은 독특한 외관

▶ 건축주, 전망에 안정적 수입 원해, 1ㆍ2층 상가 3층 원룸서 세 받아

공간을 비우니… 시선이 깃들고, 발길이 멈췄다

남산 자락 아래 선 서울 후암동 복합주거 건물. 1,2층은 상가, 3,4,5층은 주거로 이뤄진 건물은 한가운데가 비워져 있어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이끈다. <신경섭 건축사진작가 제공>

공간을 비우니… 시선이 깃들고, 발길이 멈췄다

거실 앞에 작은 베란다를 만들었다. <신경섭 건축사진작가 제공>


남산 자락 아래, 서울 후암동 경사진 골목에 건물 하나가 섰다. 후퇴하는 듯 전진하며 다시 후퇴하는 외관이 묘하게 보행자의 발길을 이끈다.가까이 다가선 건물의 정면은 뻥 뚫려 있다. 용적률과의 소리 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겁 없이 한가운데를 덜어내버린 이 건물은 올해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한 건축가그룹 경계없는작업실(문주호ㆍ조성현ㆍ임지환 소장)의 작품이다. 세 건축가는 주변과 어우러지는 건물의 바람직한 자세를 “비우는 것”이라고 봤다.

건물의 작품성과 흥행성?

시작은 조성현 소장의 장인어른이었다. 대기업에서 해외근무를 주로 해온 그는 은퇴 후 꿈만 꿔왔던 일을 현실화했다. 바로 채광 좋고 전망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다. “외국에서 근무하다 보면 주거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기 쉽지 않아요. 좋은 곳은 이미 다 현지인 차지죠. 반지하까지는 아니지만 1층의 평수 작은 집에서 살다 보니, 나도 빛 잘 들고 풍경 좋은 곳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컸어요.”


땅을 선택한 첫 번째 조건은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나이 들수록 적막강산 보다는 사람 냄새 풍기는 곳에서 사는 것이 적적함을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땅 바로 위 후암동 전망대, 이른바 소월길 엘리베이터가 있는 주가로는 남산과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조금씩 예쁜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아래로는 서울 시내 전체가 탁 트여 펼쳐져 있었다.

또 하나의 조건은 은퇴 후 부동산을 통한 어느 정도의 안정적인 수입원이다. 건축가들은 “은퇴자들에겐 중요한 이슈”라고 강조했다. “최근 도심에 집을 짓는 사람들 중 아파트처럼 획일적이지 않은 나만의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단독주택을 지을 여력은 부족해 아래층에 임대세대를 두고 본인은 위층에서 사는 식의 복합주거를 많이 짓죠. 이럴 때 건축가들은 임대수익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는 부동산 수익을 설계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봤어요.”

건물의 아름다움과 수익성은 마치 영화계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의 대립구도처럼 인식돼 왔다. 전자는 설계자, 후자는 ‘집장사’의 할 일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부동산 수익이란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금단의 영역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건축가들은 아예 설계에 이를 끌어들였다.

소월길 엘리베이터가 있는 주가로에서 건물을 봤을 때 2층과 눈높이가 딱 맞았다. 건축가들은 1,2층에 상가를, 3,4,5층은 주거로 기획한 뒤 1층부터 5층까지 층별 최대개발 가능영역을 조사했다. 그런 다음 층별 단위면적당 임대료를 계산해 용적률을 초과하는 면적을 평당 임대료가 가장 적은 2층에서 덜어냈다. 물론 임대료 때문만은 아니다.

“저희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골목 안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까’였어요. 우리가 택한 방식은 ‘비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 건물이 꽉 차 있으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2층 한가운데 비워진 공간을 만들어서 보행자들로 하여금 괜히 계단이라도 한 번 오르고 싶고, 눈길이라도 한 번 더 주고 싶은 건물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건물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있었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본 건물의 방향이 북면이라 일조사선제한의 영향으로 층층이 내려오는 디자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게 마치 건물이 등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건축가들은 층층으로 내려오는 조형을 감추거나 숨기기 보다 건물 옆쪽에도 층층의 디자인을 연결시켜 전체가 하나의 입체적인 계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주거지역에선 어쩔 수 없이 건물의 북면이 묘하게 뒷면처럼 보여요. 안 쓰는 물건들을 놓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건물의 경우 보행자 입장에서 북면이 건물의 정면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앞뒤의 구분이 명확해 지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으면 했습니다.”

1층은 카페, 2층엔 가방 가게가 들어섰다. 3층은 원룸 3세대, 4층은 조성현 소장 부부, 복층으로 꾸민 5층은 장인어른 부부가 입주했다. 손님 초대를 즐기는 두 가구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거실을 집의 중심에 두고 방은 잠을 잘 수 있는 용도로만 작게 만들었다. 서울 시내를 향해 확 트인 남쪽으로는 전면창을 만들어 햇볕과 전망을 한껏 담았다.

복층으로 된 5층의 전망은 특히 드라마틱하다. 거실뿐만 아니라 위층 욕실에도 남쪽을 향해 유리벽을 설치해, 도시를 내려다보며 샤워를 할 수 있다. 지난해 말 입주한 건축주는 거실 식탁에 앉아 멀리 관악산과 대모산을 마주하며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 됐다. 그는 “미세먼지가 없는 맑은 날에는 돈을 받고 보여줘야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며 웃었다.

옥상 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일궜다. 남산 자락을 제외하고는 서울 시내가 360도로 내려다보이는, 거의 사치스럽다 해도 좋을 정도의 전망이다. 이곳에서 지인들과 함께 종종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것도 건축주의 낙이다.

비워 놓은 2층 공간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다. 1층 카페에 들른 손님들은 쾌적한 실내를 두고 굳이 여기까지 커피잔을 들고 올라와 사진을 찍고 간다. 건축가들의 의도대로 시선이 깃드는 곳, 걸음이 멈추는 곳, 사람이 머무는 곳이 되었다.

건축가들은 건물을 “비우는 일”을 동네를 향해 건물을 “내어주는 일”이라고 봤다. “요즘 원룸촌에는 전부 1층이 필로티 주차장으로 돼 있잖아요. 길은 공적인 공간인데 바로 사적 공간과 붙다 보니 보행자 입장에선 거리가 연장이 되질 않는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을 위해 적당히 열어두고 비워두는 것, 이게 저희가 생각하는 오래된 동네와 어울리는 방법입니다.”

<황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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