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햇빛이 말을 걸다’

2018-07-10 (화) 권대웅(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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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말을 걸다’

윤태자,‘#82’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1962- ) ‘햇빛이 말을 걸다’

세상에 봄을 선사하기 위해 햇살은 수백 광년을 달려왔다고 한다. 햇살의 전갈을 알아들은 강이며 나무들, 그리고 플랑크톤처럼 작은 생명들이 서로 서로 응답하며 깨어난다. 눈부신 봄은 그렇게 어둠을 뚫고 오래 오래 달려온 햇살 덕분에 온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만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전갈들이다. 세상은 이처럼 작은 경이들로 가득 차 있지만 듣지 못하는 우리들. 가만 귀 기울여 볼 일이다. 그러면 아마 교통체증에 걸린 차들 위에도, 마켓이나, 오피스, 광장이나 뒷골목에도 빛나는 햇살의 언어들은 말을 걸어 올 것이다, 우리들을 위해. 임혜신<시인>

<권대웅(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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