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3월 북한에 체포된 미국 여기자 2명이 억류 수개월 만에 극적으로 풀려나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두 여기자의 귀향은 5개월 가까이 숨 가쁘게 진행된 미국과 북한 간의 막후 협상의 성과였다. 미국 정부는 여기자들의 신변안전과 북한당국에 의한 적절한 처우 보장을 위해 가능한 모든 채널을 동원했다.
당시 미국정부 조치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미국 내 여기자 가족들을 위한 심리적 배려였다. 미국정부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기자 가족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럼으로써 북한에 억류돼 있는 자국민을 정부가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남은 가족들에게 계속 상기시켜준 것이다.
미국정부의 최우선 국가정책 과제는 ‘자국민 보호’다. 자국민이 해외에서 위험에 빠졌을 경우 구출을 위해 어떤 비용과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노력은 성공하기도 하고 간혹 실패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자국민을 지키고 구해내기 위한 미국정부의 노력은 남다르다.
미국 시민뿐 아니라 영주권자를 보호하는 데까지도 적극적이다. 10여 년 전 한인 영주권자인 김동식 목사가 탈북자들을 돕다가 납북돼 그곳에서 사망했을 때 연방의회와 국무부는 서면 항의서를 전달하는 등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반면 한국정부는 미온적 태도를 보여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자국민에 대한 미국정부의 책임의식을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다. 미국인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궁극적 희생’(ultimate sacrifice)이라 부른다. 그런 만큼 전몰자들을 거두고 기억하는 일에는 어떤 시한도 없다는 것이 미국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미국정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북한과 베트남, 독일 등지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들의 유해를 발굴해 오고 있다. 이 사업의 모토인 ‘그들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에는 국가의 무한한 책임의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 토대위에서 탄생한 나라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은 어떤 경우에도 소모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국민들을 마지막까지 챙기고 기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가 된다. 미국의 전몰자 추모가 유별난 것은 이런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역사적인 6.12 북미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을 통해 4가지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북미관계 구축과 한반도의 항구적·안정적 평화체제 구축, 그리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지향 같은 굵직한 내용들이었다. 마지막은 미군유해 발굴과 송환에 관한 약속으로, 앞의 것들과 비교할 때 부수적 합의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역사적 배경에 비춰볼 때 이 합의가 지닌 정치적 중요성은 다른 조항들 못지않다. 유해발굴과 송환이 약속대로 잘 진행될 경우 트럼프로서는 회담성과에 대한 여론을 호의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방향타를 쥘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의 정서를 잘 아는 북한으로서는 이것을 비핵화에 대한 의지와 선의를 보여주는 카드로 쓸 수 있다. 이런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진 것이 공동성명의 네 번째 합의사항이다.
북한은 오랫동안 미군유해 문제를 미국과의 외교적 밀당, 그리고 달러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유해 한 구당 몇 만 달러씩 요구해 수천만 달러를 챙겼다. 그랬던 북한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은 채 유해발굴과 즉각 송환을 약속했다. 유해송환을 통해 미국의 신뢰를 얻고 싶다는 희망이 읽힌다.
북미정상회담 합의에 따른 유해송환 작업이 이번 주 시작됐다. 순조로이 미군유해가 미국 측에 건네지게 되면 북미정상 간 합의의 첫 이행이 되며 상호신뢰의 밑돌을 놓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이번 유해송환이 지니고 있는 실질적·상징적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무쪼록 유해송환이 길고도 험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비핵화 여정의 좋은 출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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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