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곡법아세’ 엘리트들

2018-06-20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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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관심 때문에 TV 탐사보도를 많이 본다. 얼마 전 시청한 한 프로그램은 과거 군사독재시절 국가조작범죄에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이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다른 적폐뉴스를 접했을 때의 통상적 분노와는 다른 울분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프로그램이 고발한 사법농단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꼽히는 1975년 인혁당 사건의 자금책으로 지목돼 15년형을 선고받았던 고 전재권씨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구에서 커다란 포목점을 운영하던 전씨는 지역 유지였다. 그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송상진씨 아들에게 장학금을 한 번 준 게 빌미가 돼 간첩단 사건에 엮였다. 전씨는 8년을 복역하고 나온 후 4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부유한 동네 유지에서 졸지에 빨갱이로 전락한 그의 가족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짐작키 어렵지 않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재심을 통해 고인이 된 전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무죄판결 후 국가범죄 배상금 소송을 통해 유가족들에게는 지연된 이자가 붙은 총 4억2,000만원이 지급됐다. 끔찍했던 고통과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턱없는 액수였지만 그나마 남은 가족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됐다.


악몽이 다 끝났나 싶었던 지난 2012년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배상금 이자계산을 인혁당 사건이 있었던 1975년부터가 아닌, 무죄판결이 난 2008년부터 해야 한다는 대법원 결정이 나온 것이다. 대법원은 반환금을 내지 않을 경우 지연이자는 연 20%라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전씨 가족이 토해내게 된 돈은 무려 1억9000만원. 이 돈에 지연이자가 붙으면서 2017년 현재 액수는 4억원으로 불어났으며 집은 국가에 의해 경매로 넘어갔다. 1975년과 2012년 대법원 판결로 전씨 가족은 두 번이나 피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최근 이들을 또 한 번 울린 사법부의 추악한 민낯이 폭로됐다. 양승태 대법원이 판결을 미끼로 청와대와 뒷거래를 시도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법원행정처의 관련 문건은 “사법부가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왔다”며 과거사 관련 판결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어떤 배경에서 2012년 대법원 판결이 나왔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대법원이 보수적 색채가 강한 조직이긴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국가의 책임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결들을 내려왔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2012년부터 유독 과거사 사건들에서 합리적 설명도 없이 기존 대법원 판결과는 상반된 법리로 국가의 책임을 부인하는 판결들을 잇달아 나왔다. 국가우선주의 성향의 이런 판결들은 시대의 변화에도 역행하는 것들이었다.

사법부의 존재이유는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구부러진 정의를 바로 세움으로써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데 있다. 하지만 독재시절 사법부와 양승태 대법원은 헌법이 규정한 삼권분립의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면서까지 권력의 심기를 살폈다. 이런 부끄러운 과거는 이제 청산해야 한다. 검찰은 곧 재판거래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수사에 들어간다.

우리는 법률을 수단삼아 권력을 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한국사회를 농단하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해왔다. 박근혜의 헌정유린을 떠받친 중심축은 ‘법꾸라지’로 통칭되는 엘리트 검사출신 청와대 실세들이었다. 김기춘과 우병우는 자신들의 법률지식과 권력을 공적인 목적이 아닌, 사적 이익과 불의한 권력을 지키는 데 활용했다. 양승태의 대법원도 법을 구부려 권력에 아첨했다는 ‘곡법아세’(曲法阿世)의 혐의에서 비켜가기 힘들다.

성숙한 가치가 뒷받침되지 못한 지식은 사회를 이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위험에 빠뜨린다. 이런 지식을 발판으로 얻는 개인의 명예는 사회에 멍에가 될 수 있다. 법관의 진정한 명예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의와 용기, 그리고 올바른 소신에 바탕을 둔 판결에 있다는 것을 이번 파동을 통해 사법부 구성원들이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 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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